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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와인] ‘기다린 자만이 누리는 달콤함’ 패트리셔스 토카이 레이트 하비스트 카틴카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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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박사가 개발한 접착제는 그대로 묻혔다. 이후 6년이 흘렀다. 3M 제품 개발자였던 아서 프라이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던 도중, 찬송가 책갈피가 자꾸 떨어지자 짜증이 났다. 프라이는 문득 몇 년 전 동료가 만들었다 실패한 ‘약한 접착제’가 떠올랐다.
프라이는 6년 전 실버 박사가 만든 접착제를 찾아 찬송가 책갈피에 발랐다. 이 접착제는 종이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원할 때마다 떼었다 붙일 수 있었다. 이제 모두가 아는 포스트잇은 이렇게 시작했다.
경영학에서는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는 현상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 부른다. 199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머튼 하버드대 교수는 1945년 저서에서 세렌디피티를 ‘예상치 못한 것을 관찰하고, 이를 전략적 통찰로 전환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현대 경영에서 세렌디피티는 단순한 우연적 요소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직이 반드시 갖춰야 할 혁신 역량으로 주목한다. 화이자가 개발한 비아그라, 존슨앤존슨이 개발한 밴드에이드 반창고도 모두 의도치 않은 발견이 혁신 제품으로 이어진 사례다. 인류를 세균에서 구원한 항생제 페니실린 역시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의 실수에서 비롯한 세렌디피티 결과물이다.
피터 드러커는 세렌디피티를 준비된 마음이 포착한 기회(opportunity meets preparation)라고 설명했다. 실수나 우연도 이를 혁신으로 뒤바꿀 수 있는 조직이나 개인 역량이 있어야 발현한다는 설(說)이다. 실리콘밸리 혁신 문화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세렌디피티를 촉진하는 조직 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와인 역사에서도 이러한 준비된 우연이 존재한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토카이(Tokaji) 와인이 대표적인 예다. 토카이는 헝가리 동부 지역 작은 마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 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토카이 역시 무수히 많은 침략을 받았다.
이 지역 와인 생산자들은 16세기 말 오스만 투르크군(軍) 침입을 피하다 포도 수확 시기를 놓쳤다. 침략자들은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이 닥쳐서야 물러났다. 가을 수확기가 지나 11월 말에야 포도밭으로 돌아온 와인 양조가들은 앙상한 나무에 매달린 포도 열매를 보고 절망했다.
포도 열매 겉에는 회색 곰팡이가 자욱하게 피어 있었다. 이들은 모조리 썩은 줄 알았던 포도 열매를 치우기 위해 가위질을 하려다 놀랐다. 죽은 줄 알았던 포도 열매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 스스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여전히 살아있었다.
회색 곰팡이 덕분이었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이 곰팡이는 건강한 포도 알갱이 껍질 부분 왁스질을 파괴하고, 미세하게 구멍을 낸다.
곰팡이에 감염된 포도 열매는 수분을 이 구멍으로 계속 내보낸다. 낮 내내 태양이 내리쬐는 토카이 일대에서 하루 종일 수분을 증발시키는 대신 포도알이 머금은 과즙은 안으로 머금는다. 스스로 건포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수분이 날아가 건포도처럼 마른 포도알을 압착해 와인을 만들면 꿀처럼 달콤한 단맛이 난다. 단순한 단맛이 아니라, 귀부(貴腐)균이 과즙 구성 물질 조성에 변화를 일으켜 일반 화이트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복합적인 풍미를 함께 끌어낸다. 귀부는 글자 그대로 ‘귀하게 부패했다’는 뜻이다.
잘 만든 귀부 와인에서는 망고, 파인애플, 리치 같은 열대 과일 향과 진득한 꿀, 버터 스카치 캔디 향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이 때문에 가격 역시 천정부지로 솟는다. 오늘날까지도 토카이는 프랑스 소테른, 독일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와 함께 세계 3대 디저트 와인으로 꼽힌다.
패트리셔스(Patricius)는 토카이 지역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는 1500년대부터 와인을 만들어온 토카이 지역에서도 가장 좋은 포도밭으로 꼽히는 바라트마이(Várhegy)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2000년 여러 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데저 케칸(Dezső Kékessy) 가문이 인수한 이후, 와인 품질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2018년에는 IWC라는 세계적인 주류 경연대회에서 올해의 스위트 와인 메이커에 뽑혔다.
패트리셔스가 만드는 카틴카 레이트 하베스트는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와인이다. 이 와인은 토카이 지역 전통 품종 푸르민트를 늦게 수확해 만든다. 레이트 하베스트는 일반적인 포도 수확기보다 4~6주 정도 포도를 늦게 딴다. 포도가 충분히 익어 자연 당도가 높아질 때까지 인내하면서 시간이 주는 특별한 풍미를 고스란히 담았다.
기다림은 영혼의 교육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몽 베유
늦가을까지 포도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은 이른 아침 찾아오는 서늘한 안개, 오전 나절의 따스한 햇살, 서늘한 밤공기를 오롯이 견디며 자란다. 와인 양조가들은 이 과정을 “자연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시간”이라 표현했다.
이 와인은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구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레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