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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게임으로 거듭난 야겜 근황
네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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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출시한 비주얼 노벨 게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Fate/stay night).
사실 소위 말하는 '야겜(에로게)'이었습니다. 스토리가 매력적이긴 했지만, 선택지에 따라 히로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는 기본 틀을 갖고 있었거든요. 물론 야한 장면도 나오고요.
하지만 그 매력적인 캐릭터와 설정, 스토리 덕분에 큰 인기를 얻자 야겜의 속성이 퇴색하기 시작했죠. 대표적인 예로 지난 4월 28일 출시된 힐링 게임 <매일 ♪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
'갈등'보다는 '평화' 원하는 수요층이 만들어낸 작품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는 '성배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룰은 간단해요.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최후의 1인이 되면 어떤 소원이라도 이뤄주는 '성배'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성배 전쟁에 참여하는 대부분은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싸웁니다.
동일 인물이지만 다른 느낌입니다
반면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은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등장인물들이 치열한 성배 전쟁이 아닌, 맛있는 밥을 먹으며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물론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에서도 일상 파트는 나오지만 그 비중이 적습니다.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은 일상 파트를 100%로 채워버렸죠.
또한 색감은 화사한 파스텔톤으로, 선 처리는 동글동글하게 다듬은 부분도 원작과는 다른 안정감을 줍니다.
최애캐가 고통받는 모습을 봐야 하는 성배 전쟁
평범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살생 머신 서번트
즉 캐릭터와 설정은 좋아하지만, 복잡하고 잔인한 싸움을 원하지 않는 팬층을 위한 작품입니다. 드라마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처럼 맛있는 음식도 볼 수 있고 일상의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보면서 힐링도 할 수 있죠.
메이저는 아니지만 수요층은 확실하기 때문에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꾸준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원작의 복잡한 세계관을 몰라도 부담없이 입문이 가능해서 '새로운 팬층'을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거든요.

매일 ♪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
어떤 게임일까?

닌텐도 스위치 게임 <매일 ♪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은 이러한 만화/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합니다. 원래 2020년 5월 발매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등의 악재로 두 차례 연기, 2021년 4월 28일 정식 발매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 난이도(=요리 실력)가 낮은 세이버부터 진행됩니다.
스테이지로 구성된 조리 코스. 요리 난이도/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 요리 스테이지와 스토리 선택지
기본 틀은 스테이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요리 스테이지를 선택해서 잘 만들어내면, 점점 더 어렵고 새로운 요리 스테이지가 개방되는 식.
포니테일로 요리를 하는 린의 모습. 이건 귀하군요
세 번째 선택지를 고르면 다른 루트가 개방된다는 가이드가 뜬 모습

요리 진행 방식

재료 리스트
레시피 순서
2. 레시피와 재료 확인
스테이지를 처음 시작하면 요리 레시피를 차례대로 알려줍니다. 그냥 적당히가 아니라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진짜 레시피를 알려줘요.
새우튀김을 만드는 경우 기름의 온도를 얼마로 해야 하는지, 새우를 손질할 때 넣어야 하는 칼집 위치는 어디로 해야 하는지 등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실전 레시피를 알려주는 건 원작도 마찬가지라서, 이를 기반으로 요리를 만든 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리 시작 전 나름 디테일한 연출도 덕후들이 좋아하는 포인트
3. 요리 시작
요리는 미니 게임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면 재료를 썰기도 하고,
삶는 면이 들러붙지 않도록 조절하기도 합니다.
위아래 방향 버튼을 눌러서 불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꽤 난이도가 높은 형태도 존재합니다. 이런 식으로 요리 과정 하나하나에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해나갈 수 있어요.
4. 새로운 에피소드 및 컷신 감상
요리를 마친 뒤에는 만든 음식을 먹는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세이버가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야말로 이 게임을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해가 바뀌기 전에 소바를 먹을까요?"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소소한 음식 지식들도 채워나갈 수 있어요.

팬들을 위한 수집 요소

메인 콘텐츠는 스토리이며 일종의 업적 미션, 트레이닝, 메모리와 같은 서브 콘텐츠도 있습니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다 보면 캐릭터 개방과 함께 메모리, 스냅샷을 습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메모리 조각을 모아서 완성시키면 특별한 에피소드가 개방되는 식이에요.
스냅샷은 이렇게 상화 좌우 줌인 줌아웃을 통해 마음껏 감상할 수 있습니다. 3D 그래픽이기 때문에 원작과는 또 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죠.

허구한 날 싸우고 마력 충전한다던 페이트 맞나?
힐링에 요리 공부까지 된다..

게임 자체는 전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가 많아 보입니다. 원작에는 없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도 있고 3D 그래픽도 어색하지 않아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유용한 요리 레시피와 세이버의 행복한 표정을 잘 담아내었습니다.
반면 등장인물이 에미야 시로와 위에 보이는 3명의 히로인이 전부이기 때문에 스케일이 너무 작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팬 입장에서는 역시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8월에 출시되는 월희 리메이크도 이러다가 한국어화가 되지 않는 거 아니냐"는 불안한 목소리도 나오는 중이라고.
아무튼 2000년대 페이트 시리즈가 덕후들에게 인기를 끌 당시, 이렇게 '전연령판의 힐링 게임'으로 파생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만큼 야겜 계에 있어서는 독특하고 놀라운 행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새로운 장르로 덕후들의 지갑을 위협할지 기대해봐야겠네요.
글: 네오필
doek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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