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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난 보길도, 슬기로운 혼섬여행기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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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사월, 홀로 떠났다.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보길도로.
돌이켜보면 ‘혼섬’ 여행에서 필요한 건
결국, 슬기였다.
공룡알해변 한켠에는 채 바스러지지 못한 기암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보길도행, 핸들을 잡았다

이른 아침, 전라남도 해남 갈두항. 첫 배를 기다리는 차량 줄의 꽁무니에 섰다. 애써 달려온 보람도 없이 결항이라니. 강풍 탓이다. 바람이 잦아들고 운항이 재개되기까지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운전석에 앉은 채로 꾸벅이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 깊은 잠은 언감생심이다.
보길도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완도 화흥포항 또는 해남 땅 끝에 위치한 갈두항에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고 노화도에서 하선 후, 다시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노화도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오래전 노화도는 윤선도의 노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개척한 섬이다. 지금도 비록 관광지로의 명성은 보길도가 앞선다 해도, 행정, 교육, 편의시설 및 생활환경은 노화도가 좋다.
보길도는 면이지만, 그보다 주민 수가 훨씬 많은 노화도는 읍이다. 보길도는 같은 완도군의 청산도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순환도로가 없고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2박 3일 이하의 짧은 여정에서 섬을 두루두루 살피고 싶다면 차량을 동반하는 것이 좋다.

조선 3대 별서정원으로 꼽히는 세연정은 마치 연못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

윤선도, 그만의 왕국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운항이 재개되었다. 선착장은 분주해지고 대기하던 차량이 하나둘씩 여객선 차량 갑판에 올라섰다.
보길도는 윤선도를 떼어놓고 설명하긴 어려운 섬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울 출신이었던 윤선도는 후사가 없던 해남 윤씨 종가에 입양되었다. 그가 이 지역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다. 병자호란 당시 해남에서 칩거하고 있던 윤선도는 왕(인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세상을 멀리하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어 머물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내려온다.
세연정은 사방의 문을 모두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보길도는 윤선도의 뜻에 따라 꾸며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은 그만의 왕국, ‘윤선도원림(부용동원림)’이 완성되었다. 광대봉, 적자봉, 격자봉, 방월봉, 안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부용동은 보길도에서 가장 경치가 수려하고 또 안전한 지역이었다. 현재는 보길초등학교부터 보길저수지에 이르는 2.5km의 내륙 구간을 따라 그의 자취가 이어지고 있다.
동천석실에서 ‘동천’은 선계를 의미한다. 윤선도는 연못을 조성하고 한 칸짜리 집을 지어 그곳에서 글을 읽었다
낙서재 앞 귀암은 윤선도가 달맞이하던 바위다. 화강암을 쪼개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와 회수담이라는 두 개의 연못을 만들고 그 사이에 세연정을 지었다. 손님을 맞고 연회를 베풀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세연정이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이유가 짐작이 간다. 그곳으로부터 약 2km 안쪽에는 윤선도가 거처하고 생활했던 낙서재와 그의 아들이 조성했다는 곡수당이 있다. 그리고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가 바로 윤선도가 부용동을 훤히 내려다보며 신선처럼 글을 읽었다는 동천석실이다.

섬 여행의 꽃

섬 여행에선 역시 해변과 바다 풍광을 빼놓을 수 없다. 보길도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명소가 보옥리에 있는 공룡알해변과 예송리 갯돌해변이다.
어부사시사명상길의 보옥리 공룡알해변 들머리
두 지점은 섬의 남쪽 해안, 극심한 해식애(파도 등의 침식으로 깎여 해안에 형성된 절벽)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며, 순환 일주도로가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다. 때문에 오래전 섬사람들은 보옥리와 예송리를 잇는 산길을 트고 왕래했다.
최근에는 5.2km에 달하는 그 길을 다듬어 ‘어부사시사명상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숲과 바다의 절경이 해안을 넘나들고 군데군데 데크를 올려 위험 요소를 없앤 안전한 이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섬이 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백사장과 몽돌구역이 반씩 이어진 통리해변과 그를 감싼 해송 숲
중리해변과 통리해변은 여름철이면 백사장을 선호하는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예전에는 전복 어구들을 늘어놓아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체로 말끔해졌다. 보길도는 국립공원지역으로 해변에서의 야영과 취사는 엄격히 제한돼 있다. 단, 공식 해수욕장 개장 기간에 한해 허용된다. 비수기처럼 한적할 때라면 오히려 두 해변에서 차박을 해도 괜찮을 듯하다.
휴가철 피서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은백색의 중리해변

혼섬족의 슬기로운 끼니 해결법

얼마 전 완도군청은 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군내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관광객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 본 것. 어패류와 해조류(생선회 제외)를 이용해 만든 음식 중 가장 맛있고 경쟁력 있다고 생각하는 식당과 메뉴를 추천하도록 했다. 응답 결과는 여러 신문과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예송리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40호로, 300년 전 섬 주민들이 인공으로 조성한 방풍림이다
노화도와 보길도에서도 각각 한 곳씩 추천됐다. 찾아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노화도 만물식당의 젓국부터. 젓국은 처음이라 상당히 궁금했는데,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1인에게는 이윤이 남지 않아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단다.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진 탓이다. 그래도 다행히 젓국이 어떤 음식인지는 알아냈다. 바다장어를 건조시켜 국을 끓인 일종의 보양식으로, 가격은 4만원 정도로 꽤 비싼 편이다.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게장백반은 백반의 찬으로 나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두 번째는 보길도 세연정식당의 간장게장이다. 1인분에 2만5,000원으로 역시나 가격이 살짝 부담스럽다. 그러나 메뉴가 나오자마자 가격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무엇보다 살과 알이 꽉 찬 암게의 비주얼이 시선을 강탈했다. 짜지 않고 부드러우며, 달인 간장에서 우러난 깊은 맛이 좋았다. 특히 완도 김을 손바닥에 펼쳐 게장을 버무린 밥을 올리고, 보길도의 특산물 황칠 장아찌를 얹어 먹으니 맛이 배가됐다. 이만하면 충분히 돈값을 한다.
그러나 끼니마다 매번 몇 만 원씩 지불하고 음식을 사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길도의 민박집들에서도 혼자 온 여행자에게는 식사 제공이 어렵다고 했다. 식당이 많은 노화도에서도 백반 한 상 사 먹기란 쉽지 않았다. 이럴 땐 슬기롭게 중국집이나 분식점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교가 많은 노화도에서 한 분식점은 꽤 성의 있는 음식을 내왔다. 좁은 섬 안에서 손님이라 해야 모두 아는 집 아이들이니 그럴 수밖에. 라면도 맛있고 김밥도 탄탄했다.

돌이켜 보니 사소한 짜증은 내 여행을 망치는 원인이었다. 여정이 순탄치 않아도, 때론 배려 받지 못해도, 결코 그들의 탓이 아니다. 어려움이 있어야 느껴지는 여행의 묘미도 있다. 혼섬 여행을 한층 더 즐기는 방법. 결국, 슬기로움이 정답이었다.

보길도
가 볼 만한 곳

여객선 | 해남 갈두항 ↔ 노화도 산양항: 24회/ 1일, 30분 간격
완도 화흥항 ↔ 노화도 동천항: 12회/ 1일, 1시간 간격

예송리 갯돌해변

둥글납작한 갯돌이 1.4km나 펼쳐져 있는 예송리 갯돌해변은 오래전부터 보길도 최고의 명소로 꼽혔다. 해변 둘레에는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상록수림(천연기념물 40호)이 펼쳐져 있어 더욱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예송리해변에서 불과 400m 건너편에는 예작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의 감탕나무 또한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이다. 추후 예송리와 예작도는 해상진입로로 이어질 전망이다.

보옥리 공룡알해변

보옥리 마을 샛길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면 해변을 가득 채운 몽돌들을 볼 수 있다. 마치 공룡무리가 알을 잔뜩 낳은 듯,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한결같이 둥글둥글하다. 해변 뒤편으로는 동백 숲이 조성돼 있다. 공룡알해변의 바람은 유독 거칠고 파도 역시 세다. 투박한 풍광 속으로는 기묘한 바위들이 무리 지어 서 있다.

망끝전망대

보옥리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 해안도로가 지나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보면 보길도의 서쪽 끝점이다. 옥매, 갈도, 상도 등의 무인도가 지척에 있고 남쪽으로는 횡간도와 추자도가 또렷하게 조망된다. 이곳에는 파도를 상징하는 벤치 위에 영문으로 ‘BOGIL’을 조합한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일몰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멋진 포토존이다.

세연정

보길도에 정착한 윤선도가 세연정을 지은 것은 연회장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물가에 정자를 짓고 그 주변으로 연못을 조성하니, 술과 음악, 풍류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그만의 놀이터가 됐다.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손꼽힌다. 경내 곳곳이 고풍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연못에 반영된 세연정의 모습은 특히 신비롭게 느껴진다.

노화전통시장

노화도나 보길도의 식당들은 대부분 전복이나 기타 어패류를 취급한다. 솜씨가 좋아 다양한 요리를 골고루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는 게 단점이다. 노화전통시장은 원하는 만큼 소량으로 생물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토종 홍합, 참소라, 뿔소라, 가리비, 해삼 등을 kg당 7,000원~1만5,000원 사이에 판매한다. 전복은 생산자가 직접 운영하는 가게에서 사는 것이 가장 저렴하다.

송시열 글씐바위

보길도의 동쪽 끝 해안 절벽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윤선도가 스스로 보길도에 정착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면, 송시열은 제주도로 향하는 유배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글씨는 많이 훼손되어 형태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변 백도리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길도 여행에서 꼭 다녀와야 할 명소로 손꼽힌다.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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