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5 읽음
초능력 수사물 스테퍼 케이스, 스토리·트릭 완성도가 놀랍다


추리가 게임플레이의 주가 되는 추리게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건의 개연성은 곧 게임 전체의 개연성이 된다. 그만큼 게임의 스토리, 개연성, 캐릭터 대사 등을 포괄하는 글의 품질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나 만화와 다르게 추리 게임은 플레이어가 스스로 답을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 조절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즉 추리게임은 게임 시스템과 글의 품질 모두가 중요한 장르다.
스테퍼 케이스는 한국에서 개발됐고, 매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게임이다. 독특하게도 추리 게임인데 초능력으로 수사하는데, 이렇게 된다면 추리의 개연성이 이상해 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게임의 시스템과 진행도 여타 추리 게임과 다를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을 품고 스테퍼 케이스를 플레이 해 봤다.
*이 기사는 스테퍼 케이스, 특히 첫 번째 사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스테퍼 케이스 출시 트레일러 (영상출처: 스테퍼 케이스 공식 유튜브 채널)
초능력자, 혹은 스테퍼의 도시 런던
게임은 독특하게도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세계관이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인간을 스테퍼라 부르고, 초능력에 의해 발생되는 일을 마나현상이라 부른다. 마나현상을 일으키는 도구는 스테프, 마나현상을 일으키는 짐승은 크리처라고 한다. 스테퍼들은 능력의 세부 정보, 위험등급 등을 심사받고 런던에 정착 할 수 있으며, 위험등급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나 갈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된다.
그런 스테퍼들이 많이 살고 있는 1960년대 가상의 런던에서, 주인공은 마나현상 관리국의 마나사건 전담반의 일원이 된다. 마나사건 전담반은 마나현상에 의해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는 부서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전담반의 인원은 모두 스테퍼들이며, 게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초능력과 관련이 되는 것들이다. 플레이어는 이 생소한 초능력 범죄 사건을 조사하며 범인을 밝혀야 한다.

다른 추리 게임과 다르게 스테퍼 케이스는 초능력을 활용해 단서를 수집한다. 물론 역전 재판 시리즈의 경우에도 사이코 록 이라는 초능력 비슷한 힘을 사용하는 시스템이 있지만, 스테퍼 케이스는 거의 모든 단서 수집에 초능력이 쓰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각 사건자료들은 마나사건 전담반의 인원이 자기가 가진 초능력을 사용해 얻은 것이다. 진술서는 전담반 취조담당 테나가 진동감지 능력을 바탕으로 얻어낸 정보다. 진술서에는 진술과 심장박동 수치가 있다. 강한 심장박동은 흥분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짓을 말하거나 죽음이나 폭력과 같은 사건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를 말했을 때 나타난다.
흔적사진은 전담반 브리안의 능력으로 현장에 남은 흔적을 기록한 것이다. 시간에 따라 흔적의 명도나 색감이 변해서 해당 흔적이 남은 시간을 알 수 있다.




정보가 모였으면 플레이어들은 이제 문서에 적힌 정보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며 추리를 하게 된다. 이 부분은 많은 추리 게임들과 비슷하다. 스토리를 따라 가면서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사건의 일면에 대해 의견이나 의문을 제시하면,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대신해 가진 정보들을 통해 추리하고 의문을 해소해 주는 것이다. 이 게임은 단서 조합으로 스토리를 진행한다.
게임의 많은 정보들은 모두 문서화되고 기록된다. 흔적 사진의 경우 흔적과 발생 시간이 기록되고, 기억조사서는 사물과 사물의 기억이 기록되는 식이다. 플레이어는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주는 의문들을 이 문서에 적힌 정보를 토대로 단서를 조합해 알려주게 된다.

만약 그 단서 조합이 맞다면, 조합 성공이라는 문구와 함깨 육각형 문양이 뜨고 스토리가 계속해서 진행된다. 반면 단서 조합에 실패하면, 조합 실패라는 문구가 뜬다. 단서 조합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으며 복수 정답이 가능한 경우도 있고, 진행이 막힌 플레이어를 위해 힌트 기능도 존재한다. 조합에 성공해 스토리를 진행했다면 ‘로지컬!’이라는 문구와 함께 게임이 저장되고 다음 스토리로 넘어가게 된다.


게임은 그렇기에 꽤나 쉬운 편이다. 게임의 등장인물과 주인공은 마치 화면 밖의 플레이어가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의문을 제시해 주면서 추리를 이어간다. 스토리를 따라 비밀을 풀고, 범인을 찾고! 그렇게 기자는 게임의 첫 번째 사건을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해결하지 못했다.
처음에 첫 번째 사건의 엔딩을 보고 분기점이나 타이틀로 돌아가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게임이 데모버전인 줄 알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화면으로 돌아왔을 때 아님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 이 게임은 사건 마지막 부분에서 교묘하게 잘못된 추리를 하도록 만들었고, 기자는 가짜 엔딩을 끝까지 본 바보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사건에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은 용의자 겔러의 스킬 ‘비가시성 물체 조작’ 이 염동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헥사 로직을 통해 찾아낸 단서(겔러는 멀리 있는 물건을 조종하지 못한다, 겔러는 하늘을 날 수 있다, 스테퍼 중에서는 스킬을 교묘하게 속이는 이가 있다, 극단에 미지의 네모난 물체를 다루는 스테퍼가 있다 등)를 자세히 살피면, 그녀의 초능력이 염동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물체를 생성하고 조작하는 능력임을 알 수 있다. 플레이어는 헥사 로직을 통해 비밀을 알아낸 후에 진짜 범인을 찾고 사건을 종결할 수 있다.

게임의 장점은 세계관이 스토리 진행에 잘 녹아 들어 있다는 점이다. 세계관 설정과 이것을 설명하는 스토리 소재가 각 사건 마다 적절하게 배분되어, 특정 사건에 너무 과한 세계관 정보가 쏟아져 피로를 가중시키거나, 너무 적은 정보가 있어 흥미가 떨어지게 하는 부분이 없었다.
첫 번째 사건은 주인공, 세계관, 그리고 세계관에 있는 모순을 소개하기 위해 ‘극단’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택한다. 두 번째 사건부터는 세계관과 주인공과 함께하는 전담반 캐릭터가 소개되는데, 두 번째 사건 펫 숍은 세계관에서 크리쳐, 위험등급의 의미, 그리고 테나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세 번째 사건 마술사의 방은 핵심 소재인 스테프와 전담반 브리안을 소개하며, 브리안과 스테프가 연관이 깊은 소재라는 점에서 개발진의 높은 스토리 기획력이 드러난다.
반면, 캐릭터성과 캐릭터 대사의 품질은 약간 떨어지는 편이다. 주인공과 테나, 브리안 모두 전형적인 캐릭터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듬어서 낸 것에 가깝다. 주인공의 캐릭터는 너무 평범하고 무지하며 편견 없고 올곧은, 전형적인 주인공 그 자체다. 캐릭터들의 일반적인 대사는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독백의 경우 지나치게 오글거리고 유치한 대사 때문에 집중이 깨지기도 한다.

초능력을 범죄에 활용한 트릭 또한 완성도가 높다. 만능이기 때문에 추리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초능력을 정보와 문서로서 한계가 명확하게 만들었고, 또 다시 그 정보를 오해하게 만들어 이중의 트릭을 사용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범인의 초능력 정보가 중의적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주인공이 이를 오해했고, 범인은 일찌감치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결국 끝까지 범죄에 쓰인 능력을 밝혀내지 못한 기자는 피해자가 초능력으로 자살했다 결론을 내어 창피한 도전과제까지 달성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