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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정리] 로마 왕정>>공화정 이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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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이 쌓여서 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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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왕정으로 시작해서 약 250년(기원전 753~509년)만에 근본적인 체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다방면에서 국가의 체질을 바꾸는 일은 많은 진통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다.
☀공화정☀
➡소수 엘리트 집단이 통치하는 체제.
특히 로마는 집정관-원로원-민회의
삼각체제로 대표된다.
두 명의 집정관과 300명의 원로원이
국정의 키잡이가 되어
민회와 협력하여 국가를 다스린다.
왕정에 비해 원로원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
🖇공화정 이행기 주요 인물🖇
🗡브루투스
➡로마 공화정의 창시자.
타르퀴니우스와의 전쟁중 전사했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
➡로마에 공화정을 안착시킨 인물.
로마 집정관에 수년간 연임하며, 탁월한 역량으로 로마의 체제 이행에 따른 위기를 잘 극복한 인물.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별명 '푸블리콜라'가 성처럼 붙어 불려지게 되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로마 왕정의 마지막(7대)왕. 폭정과 독재적 통치로 인해 민심을 잃어가던 와중 아들의 스캔들이 도화선이 되어 로마에서 쫓겨났다. 이후 왕위를 재차지 하기 위해 끊임 없이 로마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체제 이행에 따른 진통 5가지!💊💊
1. 젊은이들의 역모 사건.
BCE 509년,
공화정 체제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로마의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를 복권시키기 위해 작당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시작도 전에 실패 해버렸다.
2. 타르퀴니우스와의 전쟁.
BCE 509년,
로마 젊은이들의 역모가 실패한걸 알게된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계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였다. 로마 초대 집정관 중 한명인 브루투스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접전 끝에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로마는 공화정 체제를 조금 더 시험대에 올려볼 수 있게 됨.
3. 에트루리아인들 이탈.
자국민 출신 타르퀴니우스가 로마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에트루리아 세력들이 대거 이탈했다. 로마의 정계와 재계에는 에트루리아 세력들이 다수 포진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즉각적인 국력유출로 이어졌다.
4. 라틴동맹의 약화.
인근 라틴 국가들이 더 이상 로마를 중심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로마가 내부적으로 혼란한 틈을 노려 공격까지 했다. 더 이상 왕이 아니라 1년 임기짜리 집정관에게 동맹 전체의 지휘권을 주는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5. 에트루리아계 도시들과의 끊임 없는 전쟁.
클루시움의 왕 명장 포르센나와의 전쟁은 특히 위협적이었다. 도시 전체를 포위당하기까지 했었기 때문. 그러나 로마는 '왼손잡이 무티우스"의 활약으로 위기를 겨우 모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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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숱한 위기와 뼈아픈 국력 유출 속에서도 체제 이행에 성공했다.
왕정 250년동안(753~509) 착실히 성장을 이룬 로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 성장한 만큼 다음 단계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로마의 성숙도에 맞는 보다 안정적이고 유기적인 체제가 필수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일이든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변화의 정도에 비례하다시피 상존하는 손실을 감내해야한다.
따라서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 변화에 드는 막대한 에너지를 버틸만큼의 여력이 받쳐주는지가 관건이 된다. 즉 얼마나 내실을 잘 다져놓았는지가 성패를 좌우한다.
개인적인 차원이든 국가적인 차원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