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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 만드는 일상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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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욘 포세 등의 작품을 편집했다.
©unsplash
책 만드는 사람, 아니 문학을 좀 좋아하는 분이라면 익히 알겠지만 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노벨문학상 시즌’이 돌아온다. 보통 야근하지 않는 편집자(특히 해외 문학 편집자라면 더더욱)마저 이날만큼은 편집부에 남아 과연 누가 영예의 주인공이 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다소 변명처럼 들리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그 상’을 수상하리라고 전혀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다만 몇 년 뒤에 나오리라고, 작가의 전 생애를 기념하는 기념하는 상인 만큼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그저 관성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유튜브 화면에 얼굴을 비친 편집자들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꼽았고, 나름대로 분석을 곁들여가며 아시아 여성 작가에게 상이 돌아가리라고 예측하면서 오후 1시의 한가로운 햇살에 물든 발표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 그 순간 익숙한 이름이, 틀림없이 우리나라 말로 된 이름이 들려왔다. ‘한강!’. 나와 동료들은 본능적으로 환호했고, 우리 출판사에 그분 책이 있든 없든 그런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내 삶의 언어로 삼은 문학 편집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맛봤으니 과장 좀 보태자면 여한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때의 감격과 무아지경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제외하면 그날의 모든 일이 여전히 꿈만 같다. 그 대사건이 있은 뒤로 책과 관련한 뉴스가 이토록 자주 거론된 적 있었던가? 일단 나의 길지 않은 생애를 뒤적인 결과, 단연코 없었다. 오래도록 책을 읽어왔고, 편집자로 살아온 지도 벌써 십수 년이다. 그런데 돌연, 이제야, 내게 책과 독서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늘어나 무척 놀랐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뭔가도 아니고, 살아생전 누구든 경험해 봤을 일일 텐데, 왜 새삼스럽게?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책과 독서, 심지어 편집에 관해 잊고 산 건 내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평생 문학책이라곤 읽어본 적도 없는 지인이 뭔가에 홀린 듯 진지하게 책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건네자, 책 만드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다며 먹고살기 힘든 세계라는 말만 되풀이한 쪽은 나였다. 나는 최근에야 사람들이 다시금 독서를 멋진 뭔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더러 세상사에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냐고 따져 물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지만 한없이 아래로 내리긋는 책의 판매 추이를 보고 있노라면, 사라져가는 출판 관련 예산을 목도하노라면 요즘 독서가 유행이라는 말이 더욱 낯설게 다가온다. 일종의 노스탤지어인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덕에 출판사 풍경이 뉴스에도 나오고, 늘 아파트와 주식 얘기만 하던 사람들마저 독서를 열망하게 됐으며, 어느새 책이 유행의 최첨단에 서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여태 감격스러운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 익숙해서 원망하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던 ‘책 만드는 일’을 반추했다. 솔직히 문학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전 세계가 야단법석이냐는, 허심탄회하지만 그만큼 대답하기 곤란한 철학적 질문을 들은 탓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단지 문학이 좋아서 이 일을 해왔다. 더구나 좋아하는 덴 달리 이유가 없으니 사실상 맹목적으로 책을 만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편집 노동자를 곤경에 빠뜨릴 만큼 치명적인 존재론적 질문엔 이제껏 내가 애써 외면해 온, 책을 만들고 문학을 편집하는 일의 참된 의미가 들어 있다. 일로 자아실현을 하려 하면 인생을 그릇친다는 소리를 들은 뒤로(번아웃으로 향하는 지름길) 편집자란 모름지기 책이라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여왔다. 그러는 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무심코 ‘돈을 버는 보람’으로 상쇄해 온 건 아닐까? 문학책을 편집한다는 것은 인류의 고통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 놀랍게도 문학의 가치는 바로 이 고통 속에 도사리고 있다. 작가뿐 아니라 편집자도 이런 자각이나 사명 없이는 감히 책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은 저마다 비슷하지만 불행은 제각각이고, 이에 더해 찰리 채플린도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 오늘날 세상 모든 것들(불행과 비극마저)이 구경거리로 가공돼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만큼은 비극이 일회성 오락으로 휘발되지 않도록 당신을 고통 곁으로 거세게 끌어당기고, 그 고통을 흔하디흔한 광고 전단이 아닌 공감의 영역으로, 그리하여 변화를 촉구하는 행동으로 옮겨놓는다. 문학책을 손에 쥐고 책장을 펼친 순간, 독자는 이미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도처에 숨죽인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연쇄하는 비극을 결코 잊지 말라고 호소하는 작가의 문장 앞으로 독자의 눈동자를 이끄는 일, 어쩌면 나는 책이 아닌, 바로 이 일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