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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더니즘 건축만 찍는 사진가 이야기

샤를로트 페리앙이 제네바 유엔 궁전 E동의 의회 홀을 위해 디자인한 의자. 이 건물은 1966년부터 1977년까지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 배질 스펜스 경(Sir Basil Spence), 유진 보두앙(Eugène Beaudouin) 등이 설계에 참여했다.
건축가 앙드레 보겐스키(André Wogenscky)와 아내이자 조각가 마르타 팡(Marta Pan)의 집 ‘메종 보겐스키(Maison Wogenscky)’. 1950년대 초 파리 근교 생레미르셰브뢰즈(Saint-Rémy-Lè-Chevreuse)에 지어진 이 집은 부부가 설계 과정에서 독특한 디자인 요소를 함께 구상했다. 메인 유리문에 사용된 아름다운 문손잡이도 그중 하나다.
모더니즘 건축이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간결한 선과 기하학적 형태, 기능과 용도. 하지만 체코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아담 슈테흐(Adam Stech)의 사진 아카이브를 보는 순간 모더니즘 건축 이면에 숨겨진 다채로운 얼굴들이 보인다. 유려한 곡선과 유기적 형태, 풍부한 디테일…. 아담 슈테흐는 15년 동안 자신의 카메라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의 숨은 얼굴을 탐구하고 기록해 왔다. 그의 사진 속 모더니즘 건축물에는 기능과 실용에 머물지 않고 창의적 디테일과 장식성을 꽃피운 면모가 담겨 있다. 슈테흐는 이 사조가 지닌 다양성과 독창성을 조명하며 모더니즘 건축 언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경이로운지 알리고 있다. 15년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건축물을 탐구하고 촬영해 방대한 모더니즘 건축 아카이브를 구축한 것이다.
‘빌라 플란차르트(Villa Planchart)’는 지오 폰티가 예술 애호가 부부 아날라(Anala)와 아르만도 플란차르트(Armando Planchart)를 위해 설계한 집. 사랑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풍부한 예술적 요소와 독창적 디자인으로 가득 차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시볼트 반 라베스테인(Sybold van Ravesteyn)은 1930년대 로마 바로크 건축의 영향을 받아 고전적 요소를 현대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융합한 절충주의 모더니즘을 창조했다. 이 난간은 도르드레흐트에 위치한 ‘쿤스트민 극장’에서 볼 수 있다.
영국 건축가 랄프 어스킨(Ralph Erskine)은 스웨덴으로 이주해 1940년대부터 건축과 자연의 조화를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모더니즘을 발전시켰다. 리스마에 지어진 그의 빨간 집은 20㎡ 규모로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 소박한 스타일이 결합된 단순미를 보여준다. 실내 중앙에 설치된 유기적 모양의 벽난로.
야심 찬 모더니즘 건축 아카이빙 여정은 어떻게 시작됐나
건축에 대한 호기심과 직접 건축물을 경험해 보는 설렘이 이 프로젝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단순히 사진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공간을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흥미롭게도 어릴 적에는 해양생물학자를 꿈꿨다. 지금은 생물이 아닌 집을 탐험하고 있지만 그때의 모험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대학에서는 미술사를 공부했지만 결국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이 당신의 최종 목적지였나 보다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애정은 프라하의 찰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 17세 때 지역 신문에 모더니즘 주택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는 곧 평생의 열정이 됐다. 그 후 거의 20년 동안 예술과 건축,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과 잡지·구글·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점진적으로 주제를 탐구했고, 이를 문서화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 여행의 성공 여부는 매일 최소 한 곳의 개인 주택을 방문했는지로 판단했다.
가장 성공적인 여행지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다. 당시 〈월페이퍼〉에 카라카스 모더니즘에 대한 기획 기사를 기고하던 중이었다. 6일 동안 열다섯 채의 주택을 둘러봤는데, 특히 지오 폰티가 설계한 빌라 플란차르트(Villa Planchart)가 기억에 남는다. 20년 전부터 꼭 방문해 보고 싶었던 장소였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모든 세부 요소가 놀랄 정도로 인상적이었고, 그 감동적인 순간에 함께한 여자친구 니콜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인 여행이었다(웃음).
낭만적인 이야기다. 남미 외에도 유럽, 아시아를 여행하며 지역별 모더니즘 운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 양상을 탐구해 왔다. 이를 통해 발견한 것은
모더니즘 건축은 역사나 문화, 기후, 지리적 요인에 따라 그 지역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나는 체코부터 프랑스, 브라질, 에콰도르까지 다양한 나라의 건축 문화에 매료됐다. 이를테면 건축가 에도아르도 겔너(Edoardo Gellner)는 알프스의 전통 건축 문화를 근대주의와 결합해 단순함 속에 지역성을 담아냈고, 알프레드 프라이스(Alfred Preis)는 하와이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반영해 완전히 열린 설계로 자연과 조화를 이뤘다. 흥미로운 점은 두 건축가 모두 비엔나에서 동일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각자의 맥락에 맞춰 모더니즘을 독창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같은 원칙이라도 지역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야말로 모더니즘 건축의 진정한 매력 아닐까?
르 코르뷔지에와 다른 국제적 모더니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1920년대 우루과이에 모더니즘을 처음 도입한 건축가 훌리오 빌라마호(Julio Vilamajó).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그의 자택은 지역 건축의 전통과 모더니즘, 아르데코 스타일이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거실 천장 조명은 다채로운 유리구슬로 보석처럼 아름답다.
로마 아파트 ‘카사 몰레(Casa Mole)’의 로비에는 통합된 좌석 공간이 숨어 있다. 1933년 부유한 변호사를 위해 비토리오 발리오 모르푸르고(Vittorio Ballio Morpurgo)가 설계한 이 아파트는 이탈리아노 노베첸토(Italiano Novecento) 스타일의 우아함과 예술적 풍요로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 몰레의 침실 중 하나는 녹색 그러데이션 가구로 꾸며져 있다.
2024년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엘리먼츠 Elements〉 전시 프로젝트를 비롯해 당신의 아카이브를 살펴보면 각 건축물이 지닌 특정 디테일에 주목하는 듯하다
건축물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세부 요소는 전체 구조보다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예컨대 창문이나 문, 손잡이 같은 작은 요소는 단순히 기능적 도구를 넘어 우리의 감각과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디테일이 없다면 건축은 영혼도, 기능도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주택과 건물을 방문하면서 책이나 자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디테일을 발견하곤 이를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각 디테일은 단순한 부속물이 아니라 건축 전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 건축을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진정한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 승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이후 비엔나의 마크(Mak) 센터로 〈엘리먼츠〉의 여정이 이어졌다. 이 전시를 기획한 계기는
2017년에 런던 브럼프턴 디자인 디스트릭트에서 열린 〈오브젝츠 오브 리파인먼트 Objects of Refinement)〉전이 시작점이다. 전시 목적은 모더니즘 운동이 지닌 예술적 혹은 디자인적 해결책과 장르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모더니즘 건축이 지닌 약 500점의 문(Doors) 사진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하면 모더니즘 영향을 추적할 수 있다. 단순히 기능적 요소로 여겨졌던 문이 다양한 형태와 아이디어를 통해 창조되고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엘리먼츠〉를 엮을 때 특정 건축가의 작업에 집중하기보다 가능하면 많은 건축가의 디테일을 기록하려고 했다. 모더니즘이 제시한 다양한 해결책과 영향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뒀다.
모더니즘 건축을 추적하고 기록해 온 모든 활동의 최종 목적지는
건축과 역사를 다루는 모든 이에게 유의미한 참조가 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많은 국가의 건축물을 문서화해서 학생과 실무자들이 학습하고 연구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모더니즘 건축의 주류를 넘어 다양한 층위를 탐구해 같이 진행된 다른 모더니즘 움직임들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유명한 건축가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들의 작업도 조명하고 싶다. 이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 역사에 대한 깊고 포괄적인 이해에 기여하고 싶다.
모더니즘이 아닌 다른 건축양식을 탐구할 계획도 있는지
아마 이 프로젝트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매주 새로운 사진을 찍으며 아카이브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지금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내 평생의 열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모더니즘 건축을 기록하고 싶다. 내년에는 스위스 플림스(Flims)의 다스 겔베 하우스(Das Gelbe Haus)와 프랑스 루아양(Royan)에서도 모더니즘 건축물을 탐방할 계획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아르누보를 탐구하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1990년대 건축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담 슈테흐가 생각하는 모더니즘이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아이디어와 비전을 담은 운동이며, 진정한 현대성의 해방. 당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들의 아방가르드한 아이디어와 문제 해결 방식이 얼마나 예술적이었는지! 모더니즘은 디자인의 황금기였으며, 현대 디자인의 기초를 세운 시기라고 본다. 특히 모두를 위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지금도 디자인 업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헝가리 출신 조각가 겸 디자이너 피에르 세켈리(Pierre Szekely)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아이들을 위한 조각 놀이터, 독특한 주택 및 가구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중 하나는 1963년에서 1965년 사이에 건축가 모리스 블랑(Maurice Blanc)이 설계한 ‘그르노블 성요한 교회(Saint John Church in Grenoble)’의 문이다.
벨기에 건축가 루시앙 엥겔스(Lucien Engels)는 1950~1960년대 브뤼셀 외곽 빌보르드에 수십 채의 가족 주택을 설계했다. 서유럽의 전후 경제 호황과 관련된 부드러운 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난간은 호프슈타데에 위치한 인데그라흐트(Indegracht) 주택의 일부였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한 지 몇 달 후 철거됐다.
빌라 플란차르트의 디자인은 지오 폰티의 전후 디자인 감각을 완벽히 담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형태와 풍부한 색감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