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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집 잃고 텐트 속 보름…산불 이재민, 아직 돌아갈 곳 없다
투데이신문
몸은 지쳐 보였지만, 표정엔 놀라울 만큼 큰 동요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피 생활이 계속되면서 슬픔마저 말라붙은 듯했다. 오고 가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은 더 이상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이들의 삶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임하면 추목리에 사는 백운수(78)씨도 그중 한 명이다. 부산에서 45년을 살다 네 해 전, 건강 문제로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안동 추목리에 정착했다. 6개월에 한 번씩 가던 병원도 이제는 1년에 한 번만 다녀오면 된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불이 났다. 대피하던 날, 차가 없어 이웃의 차를 얻어 타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던 강아지는 목줄만 풀어주고 올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매일 가보는데, 안 돌아와요.”

그러면서도 백씨는 생존한 목련나무 사진을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꽃이 피었길래 찍었어요. 그걸 보니까 그래도 기분이 좀 좋아지더라고.”
그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집’이다. “정 붙이던 동네였는데… 또 어디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 자리에 다섯 평이라도 다시 지어 살아야지.”

“도망 나올 때는 아무것도 못 챙겼어요. 지금 신는 신발도 얻은 거고, 옷도 다 얻어 입은 거예요. 장독에 4남매가 5년은 먹을 수 있게 고추장 담가놨는데… 가보니까 홀라당 다 타버렸더라고.”
그 역시 가장 시급히 필요한 지원은 머물 수 있는 집이다. “컨테이너라도 만들어주면 더 바랄 게 없지.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요. 뭘 짓고 말고가 아니고, 그냥 내가 있을 집이 하나 있으면 돼. 그러면 또 살아지더라고.”
안동시는 이르면 이달 말 또는 다음 달 초까지 임시 조립주택 18동을 공급할 계획이다. 조립주택은 1년간 무료로 제공되며, 1년 연장 사용도 가능하다. 이달 중 전 세대 입주를 목표로 공공임대주택 74동도 추가 지원한다. 더불어 인문정신연수원, 청수년수련원, 숙박시설 등을 주거 공간으로 제공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경북도에 따르면 16일 기준 안동시 이재민 가운데 임시주택이 필요한 가구는 1024가구에 달한다.
피해는 주택뿐 아니라 생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사과 주산지인 안동은 과수 피해가 특히 컸다. 경북도에 따르면 16일 기준 안동의 사과 피해 면적은 791ha로, 전국 피해 면적 1위에 해당한다.

안동시 관계자들이 피해 조사를 다녀가긴 했지만, 농촌 주택 구조 특성상 보상 문제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농사에 맞게 창고를 증축하거나 공간을 늘리는 일이 흔한 탓에 무허가 구조물이 많고, 실제 사용 면적보다 훨씬 적은 면적만 보상받게 된다는 것이다.

고령의 농민들이 많은 현실에서는 심각한 장애다. 고곡리 마을 김해춘 이장은 “조립주택이 들어서는 곳이 우리 마을이랑 멀다”며 “이 나이에 농사짓는 데 왔다갔다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복구가 장기화되면서 주거 안정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며 “모든 이재민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안전한 주거 환경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