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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20년 맞은 미디어몽구 “카메라가 촛불이고 응원봉”
미디어오늘
(김정환)는 언론이 떠난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는다. “한 시간 일찍 가서 끝까지 있는다”는 그가 활동을 시작한 2005년부터 지켜온 원칙이다. “기성 언론이 가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목표 아래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용산 참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수요 시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세월호 참사 등 기성 언론이 약자의 목소리를 왜곡하는 현장을 함께 비췄다. 약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며는 ‘100명 기자 안 부러운 1인 미디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디어몽구가 지난 16일로 활동 20주년을 맞았다. 1인 미디어라는 말조차 없던 시기 카메라를 들었던 그는 누구든 1인 미디어가 될 수 있는 시대, 급격하게 바뀌는 미디어 환경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예전과 같음’을 지키고 싶다”며, “저는 항상 현장 가면 카메라가 촛불이고 카메라가 응원봉”이라고 말한다. 사건의 순간보다 그 이후를 기록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언론의 조명이 집중되는 방향과 반대편에서 ‘차가운 등잔 밑’을 비추겠다는 그를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2005년 황우석 입원 블로그로 ‘특종’
20년 전 12월16일, ‘미디어몽구’를 시작한 계기는 무겁지 않다. 황우석씨의 줄기세포 복제 시비가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서울 대학로에 살던 그는 황씨가 인근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강아지를 끌고 구경을 나왔다. 병원 정문부터 입구까지 진을 친 기자들을 찍었다. 2005년은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이 처음 생겼을 때이자, 블로그가 한창 유행일 때다. 강아지 이름이 ‘몽구’였다.
“30분 정도 다녀와서 집에서 다음 블로그에 쭉 써 올리고 잤는데, 포털 메인화면에 노출이 됐다. ‘새로고침’ 할 때마다 댓글이 수십 개 늘었다.” 특종이라고 나름대로 쏠쏠한 상금도 받았다. 뉴스화면 밖 기자들의 취재 뒷모습을 담은 장면이 언론사가 낸 뉴스보다 큰 화제가 됐다. 나흘 뒤 새벽, 인력사무소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찾은 기록이 다음 메인화면에서 또 ‘터졌다’. 그의 블로그 게시글이 같은 화면에 오른 제도권 언론사 기사보다 많이 읽혔다고 한다. 한 월간지에선 게시글을 기고로 싣겠다는 연락이 왔다.
“1시간 먼저 가서 끝까지 남는다” 원칙
그는 초창기 ‘1시간 전에 가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정말 중요한데 보도가 안 된 장면들을 위주로 기사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여러 결정적 장면을 남겼다. 2008년 숭례문이 재발화돼 전소해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은 영상, 2008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 문을 닫기 전 마지막 악수 장면, 2016년 국정농단 국면에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민주당 정치인 중 처음으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순간이 그 일부다.
그가 다음으로 찾은 현장은 서울 광화문 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였다. 활동을 시작한 이듬해였던 2006년 초 처음 수요시위에 간 그는 이후 매주 현장을 찾았다.
“처음엔 의미도 모르고 호기심 뿐이었는데,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를 규탄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황금주 할머니께서 ‘한국 정부는 우리가 빨리 죽길 바라고 있다’고 인터뷰를 했다. 당시 언론은 알려주지 않았다. 매주 가 보니,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이 별세하시는데 낭떠러지 끝에서 싸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해결해야 할 현안이자 여성 인권의 첫 걸음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기록을 넘어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여성인권 활동가들을 태운 봉고차가 가다가도 시동이 꺼지는 것을 알고 트위터(현 X)로 ‘할머니의 발이 되자’며 모금에 나섰다. 사흘 만에 6000만 원이 모였다. 후원으로 곰팡이가 핀 쉼터의 벽을 고치고, 시민들의 돌봄 자원활동 모임도 만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대다수엔 미디어몽구의 영상이 쓰였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시간이 이후 그의 활동 방향을 결정지었다고 말한다. “수요 시위 때문에 가해자를 향한 분노보다 피해자의 아픔을 먼저 알았다. 사람들은 일본 정부 관계자가 망언을 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려 하면 쉽게 분노한다. 폭발력은 크지만 금방 식는다. 그런데 정작 상처받은 피해자들 곁에 머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 정부가 무슨 망언을 하든, 정부가 어떤 발표를 하든 먼저 할머니들이 생각나고, 찾아간다. 그 이후 세월호 참사 등에서 아픔 있는 분들의 곁에 머무는 취재를 했다.”
2008년 촛불시위·물대포 영상,
시민들 무죄 입증 자료로
2008년 촛불 시위는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 시기를 두고 “언론과 같은 현장에 갔지만, 언론이 보도 하지 않는 영상을 계속 낸 시기”이자 “세상에 눈을 뜬 때”라고 한다. “100일 간 매일 평일엔 밤, 주말엔 낮 시위를 했다. 어느 날 시민들이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는데, 경찰이 버스로 길목을 모두 막았다. 시민들이 해산하지 않으니 물대포를 직사로 쏘는데,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경찰이 쏠 거란 생각도 못하고 무방비였다. 전경버스 위에도 구호를 선창하는 시민이 있었다. 수압은 사람이 날아갈 정도였다. 한 대학생이 그 때 직사에 맞아 크게 다쳤다.”
그는 이를 촬영해 ‘다음 TV팟’ 등으로 내보냈다. 시민들은 분노해 점점 더 많이 모였다. “그 장면을 찍고 아침에 첫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종로만 벗어나면 딴 세상인 거다. 평온하게 출근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그가 매일 남긴 영상은 ‘폭력 집회’나 ‘기물 파손’ 등 혐의로 수사 받거나 기소된 집회 참가자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자료로 쓰였다.
이러한 기록과 활동을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른바 ‘정의기억연대 사태’ 때가 대표적이다. “제가 모금을 독려해 도움을 드렸다고 했지 않나. 할머니들이 기특해하면서 한 달 1~2만원씩 후원을 해 주기 시작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손주라 불렀다. 그런데 정의연 사태가 터지니 ‘조중동’에서 집요하게 전화를 했다. 조선일보는 ‘할머니 계좌에서 미디어몽구 등 계좌로 수백만 원이 이체됐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월 1만 원 후원금이 7년 간 쌓인 것을 그렇게 보도했다. 응원하던 분들이 그 보도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고, 욕하기도 했다. 그 땐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가 그의 계좌 내역을 모두 공개하고 왜곡 보도를 반박했다. 그러나 미디어몽구는 5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다.
윤석열 파면 후 찾은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
2024년 4월 다시 현장을 찾았을 때 미디어 환경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모든 것이 유튜브 미디어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제는 구독자 수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것 사이를 오가게 바뀐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절대 부풀리지 말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고 되새긴다”고 했다.
지난해 말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직후 그는 곧장 국회 청사 안으로 향했다. 라이브 중계를 하며 보좌진과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는 데 함께 했다. 남태령에서 시민들이 밤을 견디고 경찰이 막은 전농 투쟁단의 길을 열던 순간, 이준석 전 대선 후보의 언어 성폭력 고발 현장을 담았다. 윤석열 대통령 파면 뒤엔 안산으로 가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을 찾았다.
그 곳에서 그는 단원고 2학년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 씨가 현장을 촬영하다,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에게 종이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찍었다. 문종택 씨는 쪽지에 “죄송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10·29 참사 유가족이 각 정부 부처가 가진 관련 자료를 함께 열람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도 기억식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적었다고 미디어몽구에 밝혔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등 역대 대통령 중 당선 뒤 세월호 참사 기억식에 참석한 이는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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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몽구는 후배 기자와 활동가들을 챙기는 선배로도 알려져 있다. 후원 자리를 만들고, 어려운 진보 언론의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산다. “차라리 내가 굶었으면 굶었지, 가능하면 일거리를 나누고, 밥은 사주려 한다. 어려움에 처한 좋은 언론들이 너무 많다. 1인 미디어는 물론이고, 요즘 민중의소리도 어렵다. 배고프지만 누군가는 현장에서 그렇게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결같다’는 말의 가치…20년 활동하게 한 건 ‘사람’”
그가 취재 현장에서 숱하게 목격한 것은 ‘사람의 변화’다. “처음엔 열심히 하려 하고, 소신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던 사람들이 달라지는 모습”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후배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도 느낀다. 아스팔트 현장에서 함께 부딪는 사진기자 동료들은 여전히 같지만, 펜기자와 방송기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20주년 소회로 “한결같고 싶다”고 말한다. “다들 ‘매년 나아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때나 지금이다 같다’는 말을 듣고 싶다. 내가 20년 간 활동할 수 있게 한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초창기처럼 한결같다’고 말해주는 시민들의 말에 힘을 내면서 묵묵히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20년이 스스로 대견하다.”
단원고 2학년7반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씨는 29일 통화에서 미디어몽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통 기자들은 오자마자 대번에 묻는다. ‘(심경이) 어떱니까’라고. 그 심경이야, 말할 도리가 없이 힘들다. KBS·MBC·SBS 할 것 없이 기자들은 모두 ‘그때뿐’이다. 주기가 다가올 때, 또 다른 사회적 참사가 벌어질 때. 그런데 미디어몽구 같은 독립 영상 활동가들은 달랐다. 처음엔 ‘기자치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말하라’ 하지 않았다. 유가족과 어색한 관계 속에서 계속 찾아왔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유가족이 느끼는 부담을 덜어주고, 계속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미디어몽구가 그래왔듯 약자의 편에서 사회적 참사를 계속 취재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