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 읽음
"타인 서러움도 안아준,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동료들이 꼽은 안성기의 명장면
맥스무비
0
영화 '라디오스타'
영화 '라디오스타'

고 안성기는 영화계 동료들로부터 인간적 존경을 받으며 선배로서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었던 사람으로 추억된다. 지난 5일 세상을 떠난 뒤 이어지는 영화계 많은 동료들의 슬픔과 추모사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안성기는, 그 이전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였다. 영화계 동료들 특히 후배 배우와 감독들이 고인이 생전 남긴 명장면을 되돌아보며 내놓은 말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한 뒤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았던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 웹진에 실린 이들의 인상평이 바로 그것이다.

‘깊고 푸른 밤’(1985년)
‘아메리칸 드림’의 욕망을 지닌 청년이 결국 절망과 비극으로 치달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배창호 감독의 연출작이다.

배우 김혜수는 10대 시절 영화를 보며 “화면 가득 들어찬 이국의 생소함과 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주인공의 강렬한 인상이 뇌리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러 겹의 감정이 겹쳐진 극 중 안성기의 얼굴을 누가 대신할 수 있었을까”라고 돌이켰다.

연출자 배창호 감독은 안성기가 “뚜렷한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라기보다는 어떤 색도 입힐 수 있는 무채색의 배우”라고 가리켰다. 안성기가 “고뇌, 우수, 사랑과 같은 기본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가 하면 그 외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배우”라는 배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사랑 또는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형”을 안성기가 잘 표현했다고 말했다.

배 감독은 “욕망을 추구하는 캐릭터는 관객들이 그 인물을 연민할 수 있도록 표현되었다. 그건 그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느낌과 심성이 캐릭터에 묻어났기 때문일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간의 욕망은 개인의 인간성과 그가 처한 환경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면서 “안성기라는 배우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고 돌아봤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배창호 감독의 작품. 1980년대 짝사랑했던 여자를 향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렸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첫사랑, 혹은 짝사랑을 다룬 영화의 ‘고전’이자 ‘교본’ 같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심 대표는 극 중 안성기가 짝사랑을 고백한 뒤 오히려 뺨을 맞고 돌아온 뒤 놀이터에서 아버지(최불암)로부터 위로를 받는 장면에서 “아이처럼 ‘앙’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이 영화 전에도, 이후에도 한국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나 대화 장면을 이토록 새롭고 섬세하게 그린 것을 본 경험이 없다”면서 “더불어 순수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의 얼굴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체현한 안성기 배우의 모습 또한 잊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투캅스’(1993년)
강우석 감독 연출로, 노회한 부패 형사와 그의 파트너가 된 정의감 넘치는 초짜 형사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 영화이다.

강 감독은 “밥 먹듯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부패 형사가 교회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장면”에 이어 파트너 형사(박중훈)와 함께 울며 겨자 먹기로 위험한 거래를 하기로 한 뒤 기도를 올리던 중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 “아, 아니에요!” 하며 짜증 내는 장면“을 기억한다. 강 감독은 “지금 봐도 압권”인 이 장면은 “연출자의 의도보다 안성기라는 배우의 노련함”에 기댄 장면이라고 돌이킨다.

‘킬리만자로’(2000년)
동생의 유골을 들고 고향인 강원도 주문진에 스며든 형사와 이제는 힘을 잃은 깡패, 그들 주변의 우울한 청춘들이 그려간 누아르. 오승욱 감독의 연출작이다.

배우 정우성은 “안성기의 연기는 참혹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 군상의 어둡고 무거운 감정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다”면서 “한때 잘나갔을 지역 깡패의 근엄한 얼굴은 순식간에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무너져 내리며, 해맑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감정 표현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이어 1980년대 ‘고래사냥’ 속 거지 민우 역 안성기를 떠올린 그는 “지나온 한국영화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2000년대 영화 ‘킬리만자로’로 스며들어, 지난 세대와 현 세대의 표현 기법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절묘하게 세대와 화합을 이룬다”면서 “그가 안성기이고, 안성기는 한국영화의 역사 그 자체이다”고 찬사했다.

‘라디오스타’(2006년)
왕년의 최고 인기가수(박중훈)와 헌신적인 매니저의 퇴락해가는 인생 속 새로운 희망과 우정의 이야기.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로도 관객의 가슴을 울렸다.

연출자 이준익 감독은 “우리 시대 최고의 명콤비”와 영화를 촬영한 소회를 전하면서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이기는 그 푸근함, 타인의 서러움까지 안아주는 그 너그러움. 누가 안성기를 대신할 수 있는가”라면서 캐릭터가 그 배우이자, 배우가 그 캐릭터였던 안성기를 추억하며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우신 분"이라고 말했다.

안성기는 2003년 맥스무비 인터뷰에서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깊고 푸른 밤'과 함께 '라디오스타'를 자신의 연기 인생에사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꼽았다. 그는 극 중 매니저 캐릭터가 "지금의 나 같아서"라고 말했다.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