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읽음
“불안한 청춘, 상실을 읽다”... 취업난 속 대학가 도서 대출 키워드는
조선비즈
0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의 모습. /뉴스1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의 모습. /뉴스1

서울 시내 주요 대학 도서관에서 학부생들이 지난해 가장 많이 빌려 본 책 절반가량이 ‘상실’ ‘폭력’ ‘불안’을 주제로 한 작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취업난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 세대의 심리가 독서 경향에도 고스란히 투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6일 각 대학에 따르면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지난해 학부생 대출 1위는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차지했다.

백년의 고독은 중남미의 가상 마을 마콘도를 배경으로 7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콜롬비아 사회의 혼란과 그 속에서 인간의 고독한 운명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가 나란히 2위와 3위에 올랐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허무주의를 다룬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5위에 올랐다.
그래픽=손민균
그래픽=손민균

고려대에서는 미국 작가 룰루 밀러의 수필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1위에 올랐다. ‘상실, 사랑, 그리고 람의 숨겨진 질서’라는 부제처럼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 책은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필독서로 꼽힌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양귀자 작가의 ‘모순’(4위),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6위) 등 삶의 역설과 단절을 다룬 작품이 상위권을 형성했다.

연세대 도서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체코 출신 세계적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3위에 올랐다. 이 책 역시 전쟁의 폭력 속 불안한 사랑과 상처를 주제로 다룬다. 모순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순위에 들었고, 구병모 ‘파과’는 7위,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8위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독서 트렌드가 청년들이 처한 척박한 사회·심리적 환경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얼어붙은 취업 시장이 결정적이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1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44.3%로 전년 동월보다 1.2%포인트 떨어지며 19개월째 하락세를 보였다. 특히 구직·학업 활동 없이 ‘그냥 쉬었다’고 답한 20대 인구는 1년 새 40만9000명에 달했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개인에게 선택과 책임이 집중되면서 불안과 상실감을 느끼는 청년층이 늘고 있다”며 “특히 대학 입학과 동시에 진로와 인간관계, 가치관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민감한 시기에 책으로 스스로를 이해해 보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누적된 점을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곽 교수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캠퍼스 생활이 단절된 경험이 학생들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고, 경쟁은 계속되는 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줄어든 상황”이라며 “이런 환경에서 상실과 불안을 다룬 서사가 공감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왼쪽)와 '백년의 고독' 표지.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왼쪽)와 '백년의 고독' 표지.

신간보다 출간된 지 오래된 스테디셀러가 반복적으로 읽히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대출 상위권인 ‘모순’은 1998년 초판이 나왔고 ‘백년의 고독’은 2000년 처음 국내 출판됐다.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가볍게 소비되는 신간 대신 검증된 고전의 깊이 있는 서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해석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공동체가 약화되고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이 커지면서 책을 통해 출구를 찾으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며 “한국 사회의 고독과 분노가 문학 작품 재조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사회 전체의 병리적 징후가 강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신뢰와 협력이 사라진 고립 사회로의 전환이 독서 트렌드에 반영되고 있다”며 “경쟁 위주의 사회 구조에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불안과 상실을 소재로 한 도서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