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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려고 2시간 기다려도 좋아…영월 청령포 뒤덮은 ‘단종 앓이’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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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의 고요한 산세가 요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제59회 단종문화제가 수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축제의 흥행 뒤에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있었다. 영화를 통해 단종의 삶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단종 앓이’ 현상이 축제 현장까지 고스란히 이어진 결과다. 스크린 속 이야기가 현실의 역사 유적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 됐다.
영월군과 영월문화관광재단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번 문화제는 지난 24일부터 사흘 동안 장릉과 청령포 그리고 동강 둔치 일대에서 펼쳐졌다. 축제 기간 방문객 수는 예년과 비교해 크게 늘어났다. 특히 24일과 25일 이틀 사이 장릉과 청령포를 찾은 이들만 3만 1333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가 넘는 120퍼센트 증가한 수치다. 영화의 인기가 유적지 방문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수치로도 명확하게 증명됐다.

올해 초부터 쌓인 누적 방문객 수도 가파른 오름세를 보였다. 올해 들어 지난 25일까지 장릉과 청령포를 찾은 관광객은 모두 36만 7768명에 달했다. 영화가 개봉한 뒤 단종의 비극적인 서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은 셈이다. 영월의 역사 자원이 대중문화 콘텐츠와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말이었던 지난 25일 청령포 일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섬 아닌 섬 청령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매표소 입구부터 영월관광센터 앞 회전교차로까지 이어진 긴 행렬은 축제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때이른 여름 날씨가 찾아와 기온이 높았음에도 사람들은 단종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긴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배를 타기 위해 최대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현장을 찾은 이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단종의 고독한 유배지를 직접 밟아보겠다는 의지가 폭염에 가까운 더위도 이겨낸 모습이다. 가족 단위 방문객부터 연인 그리고 영화를 보고 단종의 흔적을 쫓아온 젊은 층까지 연령대도 무척이나 폭이 넓었다.

메인 행사장인 동강 둔치 역시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왕의 귀환, 희망의 시작’이라는 주제 아래 열린 올해 축제는 단종의 일생을 서사적으로 풀어내 관람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특히 이번 축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청령포 유배길 행사’는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왕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유배인으로 전락해 영월로 향하던 단종의 비극적인 여정이 569년 만에 다시 그려졌다. 화려한 가마 대신 초라한 차림으로 거친 길을 지나는 장면은 지켜보던 관람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사실에 상징성을 더한 이 행사는 단종문화제가 단순한 즐길 거리를 넘어 역사를 되새기는 장임을 각인시켰다.
강원 영월군의 대표 축제인 제57회 단종문화제가 26일부터 세계문화유산인 장릉과 영월동강둔치, 관풍헌 등에서 열렸다. / 영월군

개막식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뮤지컬 ‘단종, 1698’은 축제의 방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어린 왕 단종을 영월의 영원한 왕으로 기리며 그의 넋을 달래는 메시지를 담아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단종의 죽음 뒤 영월 주민들이 그를 산신으로 모시며 지켜온 신앙과 애정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녹아났다.

여기에 올해 새롭게 도입된 단종과 정순왕후의 국혼 재현 행사도 눈길을 끌었다. 비극적인 이별을 해야 했던 두 사람의 가례를 다시 올리는 이 행사는 역사 속에 멈춰 있던 이야기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되살려냈다. 역사적 상상력을 더해 콘텐츠를 넓히려는 영월군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축제 기간 영월 곳곳에서는 지역의 전통을 살린 여러 프로그램이 쉼 없이 이어졌다. 조선 시대 국장을 그대로 되살린 단종 국장 재현 행사는 웅장한 규모로 시선을 압도했다. 수많은 인원이 유니폼과 전통 복장을 차려입고 행진하는 모습은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영월만의 민속놀이인 칡줄다리기와 단종을 기리는 제례 행사 역시 많은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고도 활기차게 진행됐다. 어린이를 위한 백일장과 사생대회 그리고 축제장 곳곳을 돌며 도장을 찍는 스탬프 미션 같은 체험형 프로그램도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동시에 즐거운 추억을 쌓는 교육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단종문화제를 찾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예전보다 부쩍 늘어났다. 단순히 지역 주민들만의 잔치를 넘어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 문화 축제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한국의 유교 문화와 왕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단종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행사를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월문화관광재단 측은 단종의 비극을 슬픔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시켜 관람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번 축제를 통해 확인한 대중적인 관심을 토대로 내년에 열릴 60주년 행사에는 더욱 차별화된 콘텐츠를 채워 넣겠다는 구상이다. 세계 유산인 장릉을 보유한 영월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겠다는 포부다.

관광업계에서는 이번 단종문화제의 기록적인 흥행을 두고 영화의 인기와 정부의 관광 지원 정책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불러온 사회적 관심이 마침 4월 여행 지원 기간과 겹치면서 영월이 확실한 관광 특수를 누렸다는 해석이다. 영월군이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역사 콘텐츠들이 대중문화라는 날개를 달고 높이 날아오른 셈이다.

지역 상권도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몰려드는 인파에 식당과 숙박 업소들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으며 지역 특산물 판매도 크게 늘었다. 역사 축제가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일을 넘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569년 전 어린 왕이 흘린 눈물의 길은 이제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위로와 희망을 나누는 축제의 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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