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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혐오 대응 근본 대안, 20년째 국회 표류 중
미디어오늘
차별금지법은 오래 전부터 혐오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강조됐다. 혐오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막을 수 있고, 혐오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기준 역할을 하는 모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제의식으로 수차례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20년 동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정치권이 차별금지법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지적을 넘어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의 없이 규제만 앞세우는 지금의 대응으로는 하나의 혐오가 지나가면 또다른 혐오가 반복되는 흐름을 끊어낼 수 없다. 혐오가 사회적 화두가 된 지금, 정치권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통과되지 못한 차별금지법 20년
차별금지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첫 발을 뗐다. 2002년 노 전 대통령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하며 당선됐고, 2003년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만들기 시작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원회를 꾸려 초안을 만들었다. 2년 간의 의견수렴 끝에 2006년 인권위는 마침내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확정하고 국무총리에 입법 권고했다. 이듬해 법무부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라며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의 항의에 밀려 성적 지향·학력·출신국가 등 7개의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한 채 법안이 발의됐고, 이마저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3년에는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보수 개신교 세력의 반발로 법안을 철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반대 세력은 ‘법안을 철회시킬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고,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굳어졌다. 나쁜 선례를 계기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차별금지법은 이후로도 발의되고 폐기되기를 반복했다. 22대 국회 들어서는 손솔 진보당 의원,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혐오 대응을 위해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할까
차별금지법이 혐오 대응을 위한 근본적인 방안으로 꼽히는 이유는 차별과 혐오를 정의할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손솔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은 차별의 범위를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나이, 출신국가, 가족형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혐오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다보니 그동안 관련 논의는 2019년 인권위가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를 기준 삼아 이뤄져왔다. 인권위는 리포트에서 혐오표현을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 지역, 인종,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개인·집단에게 모욕, 비하, 멸시, 위협 또는 차별·폭력의 선전과 선동을 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는 효과를 갖는 표현”이라고 명시했다.
법적 정의의 부재는 혐오표현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지난 5월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이벤트는 혐오 마케팅이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라는 반발이 나왔다. 배재고 혐오 응원 사태 역시 ‘학생들의 장난에 과도하게 대응한다’는 여론에도 일부 힘이 실렸다. 혐오표현을 정의할 공통된 합의가 없다는 점은 소모적 언쟁을 가속화시켰다. 논쟁이 반복될수록 ‘혐오표현을 용납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메시지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혐오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모법이 만들어지면 다른 법률에서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관련 법이 없는 영역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이를 포괄해 다룰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다. 장예정 차제연 상임집행위원장은 6일 미디어오늘에 “여러 사유로 차별이 발생했을 때 개별법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혐오도 한국의 레드 콤플렉스, 지역 혐오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혐오의 결과물”이라며 “특히 한국에는 성소수자 관련 법제가 없어 법원에서 다투기 더 취약한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넓은 그물망을 만들기 위해서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든 부처가 혐오와 차별에 대한 동일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원활한 국가 정책 수립도 가능하다. 장 위원장은 “지난해 혐중(중국에 대한 혐오) 집회가 문제가 되자 이재명 정부가 각 부처에 대책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때 각 부처에서 가장 난감해했던 건 어떤 기준으로 혐오를 판단해야 하는가 였다”며 “최소한의 규제를 두거나 국가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도 차별, 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점을 모든 부처가 동일하게 둬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은 처벌을 위한 법이다?
차별금지법이 처벌을 위한 법이라는 주장은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다. 현재까지 발의된 차별금지법에는 형사처벌 조항이 극히 한정적으로 포함돼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가령 손 의원의 법안은 차별을 당한 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에 대해서만 형사처벌 조항을 두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보복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으로, 피해자를 더 강하게 보호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용기 내 문제제기할 수 없기에 더 강력하게 만든 조항이다.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이 처벌이 아닌 ‘차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박 변호사는 “‘금지법’이라는 명칭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게 중심으로 보이지만, 차별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국가나 지자체가 차별을 없애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포함하고 있다”며 “기본적 목표는 사회적 대화, 국가의 선언, 국가와 지자체의 교육·홍보를 통해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장혜영 당시 정의당 의원이 2020년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 등에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차별시정 의무’를 담아 차별시정정책의 기본 방향과 추진 목표를 5년마다 수립하게 했다. 차별시정을 위한 실태조사에 더해 교육·홍보를 하고, 기본계획에 필요한 재정상 조치를 의무화하는 조항도 있다.

장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은 법원에서 피해자들이 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이라며 “차별과 관련해 회사를 고발했을 때 입증할 수 있는 기초 자료는 대부분 회사가 갖고 있어 노동자 개인이 입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입증 책임을 다른 민사 사건과 다르게 배분하고 있다는 점은 차별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한 차별금지법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차별금지법은 회피, 규제·처벌로 혐오 잡겠다는 정치권
그러나 정작 정부와 국회가 힘을 쏟는 쪽은 차별금지법이 아닌 규제와 처벌이다. 지난달 7일부터 시행된 이른바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인종·국가·지역·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는 정보를 새로운 불법정보 유형으로 명시했다. 최근에는 김현 민주당 의원이 유해 음원 유통을 금지시키겠다는 일명 ‘혐오음원방지법’(음악산업진흥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가 문화예술계의 반발로 2주 만에 철회했다.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23일 공무원이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혐오표현을 사용하면 최대 파면까지 가능하도록 한 공무원 징계령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혐오를 정의하는 모법 없이 개별 사건에 대응하는 규제법만으로는 혐오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박 변호사는 “국회가 행위자를 처벌하고 규제하겠다는 법들은 빠르게 만들고 있지만 규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며 “국회는 다른 혐오표현 이야기는 다 하면서 정작 차별금지법은 말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박 변호사는 그 이유를 “보수 개신교 단체들이 성소수자 인권에 반대하며 선동을 퍼뜨리고 법을 가로막아 국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진단한 뒤 “그러나 이들 단체의 혐오 선동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차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혐오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적기라는 기대감도 있다. 장 위원장은 “이재명 정부가 혐오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어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다. 2016년 일베 문제가 터졌을 때는 관련해 정부로부터 정책적으로 접근한다는 공감대를 받지 못했는데, 지금은 훨씬 심각한 문제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정부가 혐오 대응책 관련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너무나 필요하고 그 논의를 하기에도 적절한 때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첫 발의 후 20년이 지난 지금, 혐오는 일상이 됐기에 더욱 정치권의 결단이 요구된다. 장 위원장은 “이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혐오 문제를 규제하고 제도를 만들 수 있을지 기로에 서 있는 때”라며 “많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지금, 국회에서도 더 동력을 받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박 변호사 역시 “국회와 정부가 정말 혐오표현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면 차별금지법부터 먼저 제정해야 한다”며 “차별금지법 없이는 혐오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쌓이고 쌓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