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읽음
장군에서 중령으로’ 6.25 영웅 몽클라르를 아시나요
재미연구소
0
몽클라르 장군.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으로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군대는 철저한 계급 사회다. 주어진 계급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며 일사불란하게 명령이 집행된다.

때문에 계급이 낮아지는 ‘강등’은 군인에게는 불명예나 다름없다.

하지만 한국을 지키기 위해 장군(중장)직을 버리고 중령 계급장을 단 채 전장을 누빈 사람이 있다. 6.25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프랑스 육군 대대를 지휘한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1892~1963)가 바로 그 사람이다.

◆ 1·2차 세계대전에 이어 6.25까지 참전

몽클라르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베르느레(Raoul C. Magrin-Vernerey)다.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8번이나 부상당해 각종 무공훈장을 두루 받은 그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런던으로 가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한다.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은 비시 친독 정부와 나치 독일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썼다. 레지스탕스였던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도 이때는 ‘모를랑’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몽클라르 역시 가명을 썼고, 이후 본명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몽클라르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다. 하지만 당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력이 많지 않아 레지스탕스들을 현역으로 편입시켰던 프랑스 육군에서 몽클라르는 군의 미래를 책임질 중추적 존재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몽클라르는 중령으로의 강등을 자청하면서 참전을 강하게 주장한다.
중기관총을 장전하고 있는 유엔군 프랑스대대 병사.

6.25 발발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특히 인도차이나 전쟁 비용은 프랑스 국방예산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으며, 국민들의 반전 여론으로 병력 보충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에 냉전으로 인한 유럽 방위 측면에서 주력부대를 차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파견하려했으나 유엔군사령부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당시 알제리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 감독관이던 몽클라르 장군은 예비역과 현역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미 육군 보병대대 규모의 특별부대를 창설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안에 창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하자 몽클라르 장군은 “제가 그 부대의 대장을 맡겠다”며 결심을 촉구했다.

르젠 차관은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자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으로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며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몽클라르 장군의 강한 의지에 힘입은 프랑스 국방부는 1950년 8월24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몽클라르 중령을 대대장으로 한 유엔군 프랑스 대대 창설을 결정한다.

◆ 중공군 참전 후 첫 승리 ‘지평리 전투’

몽클라르 중령이 이끄는 유엔군 프랑스 대대는 1950년 11월29일 부산항에 도착해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된다.

1951년 1월 한국 전선에 투입된 이래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3차에 걸쳐 부대를 교체하며 힘들고 어려운 전투를 계속한다.

특히 1951년 2월13일부터 15일까지 계속된 지평리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6.25에서 거둔 승리 중 가장 귀중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공군을 향해 기관총을 사격하는 유엔군 프랑스대대 병사.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대대는 중공군의 2월 공세 당시 중동부전선의 전략요충지인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에 의해 고립됐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전 장병이 3일에 걸쳐 근접전투와 백병전으로 적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중공군 참전 이후 첫 승리의 기쁨을 유엔군에게 안겨주었다.

중공군이 진지에 진입했을때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맨 채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백병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그 모습에 기가 질려 후퇴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해병대, 공수부대, 외인부대, 수도방위부대 등 최정예부대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참전을 지원했기 때문에 전투의지가 매우 높았다. 여기에 몽클라르 중령의 지휘력과 카리스마가 더해지며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클라르 중령은 1951년 12월 지휘권을 인계하고 귀국했지만 프랑스대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까지 한국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프랑스 대대는 6.25 기간 동안 3500명이 교대로 참전해 전사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 등 1289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대대는 이후 ‘한국연대 제1대대’로 부대명을 바꿔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에 투입됐다가 1955년 알제리로 이동한다.

몽클라르 중령은 1963년 사망했다. 그가 죽자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은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에서 열린 장례식을 직접 주관해 그의 헌신에 대한 예우를 표시했다.

자유를 위한 신념을 위해서 스스로를 낮출 줄 알았던 사람, 자신보다 나이 어린 미군 지휘관의 명령을 기꺼이 따랐던 군인. 몽클라르 중령과 같은 군인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날 6.25를 기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