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읽음
달러 없는 미래, 실물과 기술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 전환 기점
아주경제
「달러 없는 미래」(이하경 지음, 알에이치코리아)는 세계 경제가 '신용의 시대'에서 '실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경제는 국가와 중앙은행이 돈의 가치를 보호한다는 신뢰하에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저자는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돈이 있다고 한들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핵심 부품, 최첨단 기술을 구할 수 없다면 그 돈을 온전한 부(富)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저자는 화폐의 힘이 ‘물질의 필수성×기술의 독점력’이라는 공식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짚는다. 금과 에너지, 핵심 광물뿐 아니라 전력망, 제조 능력, 반도체, AI 기술이 새로운 시대의 담보가 된다고 말한다. AI는 매우 물질적인 산업이다. GPU와 HBM, 데이터센터와 막대한 전력, 냉각시설과 송전망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형 자산운용사와 국부펀드들이 항만과 철도, 가스 배관망, 전력망, 데이터센터 같은 인프라에 투자하는 이유다.
각국은 이러한 인프라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공장을 자국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중국은 희토류, 전력 인프라, 반도체, AI 기술 등을 확보해 미국 중심의 공급망과 기술 체계에 대한 의존을 낮추는 데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다.
'소버린 AI’를 통화주권에 비유하는 점도 흥미롭다. 통화주권을 가진 국가가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하듯 AI 시대에는 최소한 국가의 핵심 영역에서 연산 능력과 GPU 사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 변화가 ‘신용의 시대’에서 ‘실물의 시대’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지는 의문이다. 달러 패권 자체가 애초에 실물과 무관한 약속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러에 대한 신뢰 뒤에는 미국의 경제력과 생산력, 군사력, 유동적인 금융시장과 법·제도가 있다. 신용은 실물과 대립하는 별개의 힘이기보다 이런 요소 하나하나가 모인 결과값에 가깝다. 미국이 금과 달러의 연결을 끊은 뒤에도 달러의 지위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금을 대신해 미국의 경제와 금융시스템, 제도에 대한 신뢰가 이를 떠받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이 있어도 최첨단 GPU를 살 수 없는 이유는 GPU라는 실물이 희소해서만은 아니다. 미국은 고성능 반도체의 수출을 통제할 수 있고, 엔비디아와 미국의 클라우드 기업들은 AI 생태계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달러 가치를 지탱해온 통화·제도적 신뢰에 더해 이제는 그 달러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정치·기술적 관계까지 중요해지고 있다. 돈이 있더라도 미국 중심의 기술·안보 질서에서 배제되면 핵심 기술에 대한 접근이 크게 제약될 수 있다. 중국이 반도체와 AI 자립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 없는 미래」라는 제목도 역설적이다. 책은 달러 중심 질서의 균열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AI 시대의 핵심 병목 상당 부분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엔비디아의 GPU와 CUDA, 글로벌 클라우드 플랫폼, 고성능 반도체의 접근을 제한할 수 있는 힘까지. 더구나 새로운 화폐 질서의 한 축으로 주목하는 스테이블코인 다수는 달러에 기댄다. 달러의 유통망을 디지털 세계로 넓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책이 말하는 ‘실물의 귀환’은 AI 시대 미국 패권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