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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계급 대물림과 미디어 재현 윤리 성찰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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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 기사에는 영화 ‘가능한 사랑’의 결말을 포함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에 수록된 ‘서른’ 주인공은 학원에서 일하면서, 학원가의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결국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아이나, 학원에 자신 대신 일하러 온 후배를 보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저들도 자신과 ‘같은 차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에 나온 대사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이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은 아이가 든 호스에서 물이 쏟아지는 장면이다. ‘가능한 사랑’에서는 어린 아이가 호스를 들고 물을 뿌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어린 미옥이 엄마가 세차를 하는 옆에서 물을 뿌리는 장면, 미옥(전도연)의 아들이 해변가의 숙소에서 허공에 물을 뿌리는 장면이다. 미옥은 세차하던 엄마를 흉내 내다 꾸지람을 들었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미옥의 엄마가 화를 낸 건 딸이 자신처럼 살까 두려워서였다. 엄마에서 미옥으로, 미옥에서 철이로 계급은 대물림된다. 철이의 얼굴은 상우의 별장에서 사는, 상우가 호루라기를 불면 달려오는 집사 얼굴과 포개진다.

이렇듯 영화 ‘가능한 사랑’은 ‘계급’과 그 사이에 위치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계급이 다른 두 부부 사이에는 카메라가 있다. 그들의 연결고리로는 카메라밖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로 찍는 일, 즉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대개 그 고통에서 한 발 떨어진 안전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카메라를 든 자가 아무리 해고노동자 가족에게 ‘이년아’하면서 친밀감을 나타내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영화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남의 것’은 배우자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서사 모두를 포함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는 해고노동자를 찍겠다면서 500만 원의 가방을 들고 해고노동자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는 포르쉐를 타고 해고자들의 대책위원회 앞에 주차를 한다. 구조조정 이후 자살을 한 해고노동자의 장례식장을 찍는 예지에게 호석(설경구)이 묻는다. “이게 재밌어 보여요?” 이 질문은 영화 끝까지 카메라 뒤에 선 사람에게 돌아온다.

예지의 카메라는 너무나 서툴고 무례하다. 인터뷰이가 집중하는 순간에 ‘이거 카메라 앞에서 다시 이야기 해줘’라면서 맥을 끊고 미옥이 호석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할 때 미옥은 눈물까지 글썽이지만 예지는 “바로 이런 거야, 내가 찍고 싶은 게”라고 반긴다. 정작 자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할 때는 카메라를 끄는 것을 잊지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는 ‘소재’가 아니기에.

압권은 예지와 배우자인 상우와의 대화다. 예지는 노동자와 말을 트고 진심으로 섞이려는 자신에게 취해 있다. 그러면서 “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예지의 모습이 불편하고 화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느껴지는 것은 이같은 시혜적인 선민의식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지의 서툴고 폭력적인 카메라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카메라나 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는 언론인이나 감독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는 계급과 함께 카메라, 즉 미디어의 재현 윤리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한다.

카메라는 폭력적인 동시에 무언가를 가능케 하는 장치

‘폭력적인 카메라’ 이야기에 머물렀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렇게까지 질문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카메라가 폭력인 동시에 무언가를 가능케 하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미옥의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찍다가, 찍을 만한 ‘재미있는 게’ 없다는 예지에게 미옥은 “재미있는 거, 노조 만드는 거?”라고 답한다. 꽤 오래 미뤄 온 노조 결성을 카메라 앞에서 얼떨결에 해낸다. 당사자를 소재로 삼던 카메라가 평소 생각만 하던 일을 실행하게 하는 계기로 뒤바뀐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폭력으로 여기면서도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행동은 의외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호석의 고백은 그 정점을 찍는다. 호석은 서툴고 폭력적인 그 카메라 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하지 못한 말을 쏟는다. 아들의 생일날 케이크를 들고 가다 ‘산 자’(해고 당하지 않은 자)의 생일 파티를 몰래 훔쳐보느라 늦은 일, 그 일로 자신이 병들었음을 깨달은 일을 털어놓는다. 호석은 심리치료 모임에서도 타인의 이야기에 눈물만 글썽일 뿐 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런 그가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연대나 계급, 희망을 주는 소리들 다 개소리”라고 외치며 과호흡에 빠진다. 카메라의 윤리적 결함과, 진실을 끌어내는 힘은 동시에 이루어 진다.
사실은 ‘불가능한 사랑’…가능한 사랑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제목의 ‘가능한’은 반어로 읽힌다. 사실상 이 영화의 제목은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이야기다. 예지는 호석과 미옥을 ‘사랑해야’한다고 믿지만 사랑할 수 있었나? 떠나는 그들에게 호루라기를 찾던 예지다. 상우는 미옥을 사랑했나? 옷을 벗고 헤엄치는 미옥을 뒤따르는 상우의 몸짓에서 드러나는 것은 급한 욕망일 뿐이다. 상우는 예지를 사랑했나? 미옥에게 풀지 못한 욕망을 예지에게 풀 뿐이다.

그나마 가능한 사랑을 하는 듯한 이들은 호석과 미옥이다. 호석과 미옥은 몸을 섞지 않고 평상에서 소주를 마시며 달을 본다. 그 달은 어린 미옥이 봉제 공장에서 지옥 같은 하루를 보낸 날 호석이 택시에 태워 데려간 월미도의 달이기도 하다. 그때의 달이 구원이었다면 지금의 달은 구원일까, 체념일까 헷갈리긴 하지만 같은 달이다.

이 영화가 집중해서 겨누는 곳은 해고된 이들이라기 보다 그들을 바라보고 찍고 쓰는 쪽이라 느껴진다. 쌍용차 사태라는 구체적 현실이 어디까지 무게를 갖는지는 끝내 알쏭달쏭하고, 그 점이 한계로 느껴지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오래 남는 건 보는 이를 카메라 뒤에서 거울 앞으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예지의 카메라가 불편한 건 낯설어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다.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이 영화의 질문은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 따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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