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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 회장, 글로벌 네트워크·현장 리더십 집중
에너지경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반열에서 평가할 만한 경영인이다. 그가 이끄는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동시에 반도체·스마트폰·바이오 분야에서 세계 공급망을 움직이는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투자와 경영 판단은 한 기업의 실적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수출과 고용, 협력업체 생태계는 물론 국가 경제와 기술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본지가 국내 오너 경영인 가운데 이 회장을 평가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다.
1편에서는 취임 4년간 삼성전자의 실적과 투자 성과를 재무자료로 살펴봤다. 이번 편에서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이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현장 중심의 업무 방식, 조직문화 변화를 통해 국제적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짚었다.
◇ 글로벌 기업인을 연결하는 삼성의 얼굴
이 회장의 가장 뚜렷한 강점은 세계 주요 기업 경영진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피터 베닝크 전 ASML CEO를 비롯해 아마존·퀄컴 등 글로벌 기술기업 경영진과 지속해서 교류해 왔다.
2022년에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찾아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안정적인 공급과 장기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EUV 장비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급업체가 제한돼 있어 최고경영진 간 협력이 중요하다.
AI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한 뒤에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삼성전자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랐다. 메타와 아마존은 AI·클라우드 고객이면서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분야의 협력 상대다. 퀄컴 역시 모바일 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 삼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반도체 장비와 AI 가속기, 파운드리 수주는 실무진의 가격 협상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공급망이 흔들리거나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는 최고경영진 사이의 신뢰와 장기적인 협력관계가 중요해진다.
이 회장이 각국 정상과 기업인이 모이는 국제행사에 꾸준히 참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리 올림픽을 비롯한 글로벌 무대를 활용해 주요 기업 경영진과 교류하고 삼성의 사업 기회를 넓혀 왔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국제적 인맥을 삼성의 무형자산으로 평가한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바이오처럼 고객과 공급망이 세계에 분산된 사업에서는 총수의 대외 네트워크 자체가 위기 대응과 사업 협력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취임식 대신 협력사…명절마다 해외 현장으로
이 회장은 공개석상에서 강한 메시지를 반복하기보다 사업 현장과 파트너를 직접 챙기는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2022년 10월 회장에 취임했을 때도 별도의 취임식이나 취임사를 두지 않았다.
회장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으로는 광주의 중소 협력업체를 찾았다. 삼성만의 기술과 생산능력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없으며 협력업체를 포함한 제조 생태계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판단이 담겼다.
명절 연휴에는 해외 사업장을 찾는 현장경영을 이어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브라질, 멕시코,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건설·전자·배터리 사업장을 방문해 현지 임직원을 격려하고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
반도체와 바이오 등 미래 사업에서는 기술 개발과 투자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일상적인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되 대규모 투자와 글로벌 고객 협력, 장기적인 사업 방향에는 직접 관여하는 형태다.
재계와 경영학계에서는 이를 \'조용한 현장형 리더십\'으로 평가한다. 화려한 선언보다 현장에서 기술과 고객, 공급망을 확인하고 관계를 쌓는 데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기업·정책 결정자들과 소통하면서도 국내에서는 협력사와 임직원 현장을 찾는 행보가 함께 나타난다.
◇ 무노조 경영 폐기…대립에서 교섭으로
조직문화와 노사관계에서도 이 회장 체제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 회장은 2020년 대국민 사과를 통해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폐기하고 노동 관련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삼성전자에서는 노조와의 임금교섭이 제도화됐고 임금과 성과급, 복리후생을 둘러싼 협상도 정례화됐다. 노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던 과거에서 벗어나 대화와 교섭을 통해 접점을 찾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최근에는 임금 인상과 함께 주식 보상 방안까지 마련하며 임직원과 회사의 성과를 공유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재계에서는 강한 노조와도 협상하고 보상 방식을 유연하게 바꾼 점을 이 회장 체제의 변화로 본다.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에서는 2024년 창사 이후 첫 파업이 발생했고 성과급 산정과 임금 인상, 보상 기준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일부 노조가 이 회장 자택 인근까지 찾아가 직접 해결을 요구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무노조 경영을 폐기한 선언에 비해 노사갈등을 조기에 조정하고 투명한 보상 기준을 마련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화를 제도화한 것은 변화지만 이를 신뢰받는 노사관계로 정착시키는 일은 아직 진행 중이다.
◇ HBM 대응 지연…네트워크를 성과로 바꿔야
글로벌 네트워크가 곧바로 사업 성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는 AI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하는 동안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과 고객 인증에서 경쟁사보다 늦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은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생산능력, 세계적인 고객망을 갖췄지만 시장 변화에 대한 초기 판단과 투자 시점이 충분히 빨랐는지는 논란이 남는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고객과의 관계도 최종적으로는 제품의 성능과 공급 안정성, 가격 경쟁력을 통해 평가받는다.
최근 삼성전자가 HBM4와 차세대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고객 인증과 공급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잃어버린 시장 주도권을 되찾고 파운드리 사업의 수익성을 회복해야 글로벌 네트워크가 실질적인 경영 성과로 연결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세계 주요 기업인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대규모 장기투자를 지속할 수 있는 오너십을 갖췄다. 현장을 중시하고 대립보다 대화와 타협을 택하는 업무 방식도 이전 삼성 경영진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한국의 삼성\'을 넘어 \'세계의 삼성\'을 대표하는 국제적 경영인의 반열에 올라설 기반은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제 남은 과제는 글로벌 인맥과 대규모 투자를 HBM·파운드리 등 핵심 사업의 지속적인 수익으로 연결하고, 노사 간 대화를 임직원이 체감하는 조직문화로 정착시키는 일이다.
전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