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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덕분에..' 반도의 흔한 룩덕러 이야기
네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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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즐기다 보면 주위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친구가 하길래 무심코 따라 시작했더니 그대로 인생 게임이 돼버리기도 하고,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나 취향이 변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오늘 RPG극장에선 여동생 때문에(혹은 덕분에) 룩덕러가 돼버렸다고 하는 오라클 스톰(닉네임) 님을 만나봤다. 카톡 프로필 사진부터 매우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채팅을 좋아했던 여동생
예쁜 옷 입은 유저 지나가면 조마조마
빨리 옷을 사고 싶어서 목청껏 외쳤던 그 말
오라클은 인천에 사는 20대 건장한 청년이다. 여느 게이머와 같이(?) 어릴 적부터 다양한 온라인게임들을 즐겨왔다. 가장 제일 먼저 접한 RPG는 역시 바람의 나라다. 이때 당시 오라클은 8살, 여동생은 5살이었다.

오라클은 여동생과 함께 초보자 사냥터에서 도토리를 주워 모으곤 했다. 누구나 한 번쯤 외쳐봤던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는 말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옷을 사기 위해서다.
룩덕러라면 한 번쯤 갈망해봤을 웨딩드레스
당시 바람의 나라엔 15000전이나 하는 웨딩드레스가 있었다. 도토리를 2300개 정도 주워 팔아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 나이 때야 돈보다는 시간이 많을 때다 보니 남매가 한참 동안을 그렇게 도토리를 주워야 했다고 회상한다. 끝내는 웨딩드레스를 손에 얻었다고 하는 걸 보니 보통 인내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쁜 옷을 얻은 즐거움을 오래가지 못 했다. 당시 바람의 나라는 레벨 21이 되면 체험판이 끝나기 때문이다. 오라클 남매는 아무것도 모르고 레벨업을 하다가 첫 캐릭터와 아이템을 전부 날려버리고 말았다. 여동생도 울고 오빠도 울었다.
지금 보면 '이게 뭐야' 싶겠지만 당시엔 엄청 예쁜 옷이었다고.
"어떻게 하긴요.. 도토리 다시 모아다가 사줬죠. 제가 사냥을 좋아했다면 여동생은 채팅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던 여동생이 룩덕질에 눈을 뜬 계기는 명절 이벤트였습니다. 그 당시 직녀 옷이 엄청 예뻤거든요."

"그래서 여동생이 비싼 옷 입은 유저를 보고 있으면 조마조마하곤 했어요. 사 달라고 할까봐. 그러다가 하필 '끈옷'입은 유저를 본 거예요. 당시 엄청난 희귀템이었는데 4500만전이나 했거든요."

"다행히 군입대하는 사촌형이 마지막으로 선물로 사주고 간 덕분에 살았어요. 끈옷이 번호마다 색깔이 전부 달랐는데 가장 싼 연두색 끈옷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걸로도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죠."
꿈 많은 어린 룩덕러
요금제의 벽에 막히다
51레벨 때 입는 옷이 예뻐서 열심히 렙업을 했던 아스가르드. 도중에 유료로 전환되면서 결국 입어보진 못 했다.
그렇게 한창 바람의 나라를 하던 중 아스가르드라는 게임이 나왔다. 동화같은 색감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동생과 함께 시작했다. 여동생은 힐러가 하고 싶다고 해서 오라클은 전사를 선택했다. 문제가 있다면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오라클도 룩덕러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옷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도적으로 갈아타고 열심히 레벨업을 했다. '헬렙'이라고 하는 레벨업이 힘든 구간을 넘어 51레벨을 찍으면 예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내는 51레벨 옷을 입지 못 했다고 회상했다. 정액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더 이상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오라클 남매가 시간을 많이 보냈던 어둠의 전설 놀이동산
어린이날 풍선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등 마을에서 놀 수 있는 콘텐츠가 많았다.
그리하여 다시 터를 잡은 곳은 어둠의 전설이었다. 당시 어둠의 전설이 유료로 전환되는 시기는 40레벨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바람의나라나 아스가르드보단 옷도 다양하고 '놀이동산'이라고 하는 유저들이 놀 수 있는 맵도 마련돼있었다. 룩덕을 좋아하는 무과금이 놀기에 좋았다.

하루는 동생이 '오빠 나 프릴살래!' 하길래 찾아봤더니 1억이나 하는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끈옷의 데자뷰를 다시 보는듯했다. 대신 초록색 프릴은 그나마 저렴해서 3500만원 정도 했고 이걸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어둠의 전설 '프릴'은 확실히 룩덕러의 로망이었다. 메이드복을 연상시키기도? (출처: http://cafe.naver.com/sclod12/134042)
초록색 프릴을 사주기 위해 오라클은 소위 노가다를 시작했다. 당시 어둠의 전설에서 레벨 11부터 퀘스트를 시작해 자이언트 맨티스라는 보스몬스터를 잡는 곳까지 진행하면 캐릭터당 500만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고 한다. 노가다도 나름 취향에 맞았는지 17캐릭터를 돌려 8500만 정도를 모았고 이중 3500만은 여동생옷을 사주는데 썼다. 대신 본인은 더 비싼 빨간색 프릴을 샀다.

'바람개비'라는 아이템도 마음에 들어 만들려고 보니 재료 '물고기 비늘'의 드랍율은 극악이었고 파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점이 오히려 '소장욕구'를 자극했다고 한다. 17개 캐릭터를 40레벨까지 키우면서 물고기 비늘도 틈틈이 모았다. 지금이라면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하겠지만 당시에는 '과금'이나 소위 '현질'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떠오른 여동생의 이미지. 그는 좋은 오빠였다..
부분 유료화의 시작
룩덕러의 시대가 열리다
무료로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메리트였다.
그러던 중 메이플스토리가 세상에 나왔다. 다른 게임과 달리 부분 유료화로 운영했고 아무리 레벨을 올려도 접속이 끊기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런 방식의 서비스 형태가 대중적이 되면서 오라클은 더 이상 캐릭터를 새로 키우면서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됐다.

사실 오라클은 메이플스토리보단 던전 앤 파이터같은 게임이 더 취향에 가까웠다고 한다. 여동생도 던파를 하진 않았지만 오라클은 혼자서도 '룩덕질'을 시작했다.
여캐보단 주로 남캐 룩덕질을 했었다는 오라클
게임에서 골드를 모으면 스펙을 올리기보단 아바타를 먼저 샀다. 함께 던파를 했던 친구들이 주로 했던 말은 '야 쟤 또 룩 바꼈다'였다. 한편으론 그를 '유니크 학살자'라고 불렀다.

하늘도 그의 룩덕질을 돕고자 했는지 항상 드랍운이 좋았다고 한다. '라포르메타', '할기의 본링', '왕가의 목걸이', '흑광검 카이너스' 등 먹었던 유니크 아이템이 수도 없이 많다. 이걸 전부 팔아서 아바타를 사는데 썼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여캐'보단 '남캐' 룩덕질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남거너 위주로 키웠어요. 6캐릭 전부 런처였죠. 룩덕을 좋아하는 유저들은 여마법사를 많이 키웠는데 저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 당시 유행하던 옷 중 하나가 '타천사 세트'같은 날개달린 게 많았는데, 저는 날개도 좋아하지 않아서 '날개없는 타천사 세트'를 주로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옷을 사기 위해
사막을 횡단한 추억
'옷 하나만 보고' 켈라 항구부터 필리아까지 무작정 걸어갔다.
그러던 오라클이 여성 캐릭터를 시작한 계기는 마비노기였다. 마비노기에는 엘프만 입을 수 있는 예쁜 옷이 있었는데 당시엔 엘프 캐릭터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어렸던 오라클에겐 거의 불가능한 과금을 하거나 엘프 수장에게 직접 가서 카드를 받아야 하는 것.

그나마 가능한 일은 엘프 수장에게 카드를 받는 방법이었는데 이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굉장히 거대한 사막 맵을 횡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느 정도로 크냐면 당시 마비노기는 하루에 2시간씩 접속할 수 있었는데 이 시간을 전부 쓰고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지금처럼 말이나 독수리 같은 탈것도 없었다. 플레이어를 발견하면 바로 공격하는 선공몹들도 많았다.
그때부터였어요.. 제가 여캐 룩덕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라클은 이틀 동안 시간을 들여 사막을 건넜고 결국엔 엘프를 만들고 예쁜 옷도 샀다고 회상했다. 이때의 성취감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아 본격적으로 여캐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비노기는 조금 독특한 풍경이 많아요. 옷을 샀으니 염색을 해야 하잖아요? 근데 염색 겹친다고 소위 '던바튼 일진'으로부터 시비 걸린 적이 많아요. 그분들은 항상 게임에 접속해있으니까 싸움나면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굽히고 들어갔죠. 그러면 RGB값이 2 정도 차이 나게 염색을 해요."
룩템은 희귀할 때
빛이 난다
정장스타일과 단발을 좋아해서 항상 2B룩을 만드신다고 한다.
이런 취향은 다른 게임을 해도 마찬가지.
룩덕질엔 플레이어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라클의 취향은 긴 생머리보단 단발머리였고 상대적으로 선택지가 적었다. 종류도 적고 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점이 오히려 불타오르게 만든다.

한 번은 니어오토마타 주인공 2B의 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단발머리 아바타를 사려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팔고 있었다. 물량이 없으니 장사꾼이 장난을 쳐놓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길드장도 포기하라고 했지만 룩덕질의 포기는 없었다. 2주 동안 장사꾼과 실랑이도 벌이고 열심히 발품을 팔러 다닌 끝에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제가 제복이랑 정장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근데 던파는 거의 없다시피해요. 그래서 2B룩은 어떤 게임을 하더라도 찾는 편이죠."
"던파에서 결투장 오오라 아바타라고 해서 마을에서 모션을 취하는 게 있었거든요. 어찌 보면 별 거 아닌데 그거 따겠다고 매 시즌 4천 판을 했어요. 룩 하나만 보고요."

"그래도 비싼 아바타보단 쉽게 맞출 수 있는 아바타가 좋아요. 예를 들면 루시우룩이 있어요. 이건 언제든지 샵에서 구매할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이외에도 청년 겐지 룩도 맞추고. 던파 말고 다른 게임에서도 이런 식이에요."
룩이 예뻐도 과금이 필요한 직업은 포기한다.
성능 때문에 룩을 포기해야 할 땐 가슴이 아프시다고.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땐 스펙에 9, 룩덕질에 1을 써요. 아무래도 (파티에서)남한테 피해입힌다고 생각해서요. 대신 '1인분을 충분히 하겠다'싶으면 룩덕질에 9를 씁니다. 10% 더 세진다고 몬스터들이 더 빨리 죽진 않더라구요."

"룩덕질을 위해 현질을 하진 않아요. 모바일게임도 마찬가집니다. 옛날 바람의 나라 할 때부터 지금까지 게임에 쓴 돈은 10만 원 정도인 것 같은데요. '현실에서 옷을 사려면 먼저 아르바이트나 일을 해야 하듯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 현금을 쓰진 않는 것 같아요."
룩덕의 정점
태양 만세
유저 사이에선 희대의 쓰레기라 불리는 팔란의 대검. 그것도 쌍검으로 쓴다.
그만큼 이겼을 때의 쾌감도 남다르다.
온라인게임을 주로 즐겨왔던 오라클이지만 최근엔 '다크소울3'같은 게임도 시작했다. 이곳에서 룩덕을 즐기는 방식은 온라인게임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다크소울3를 할 땐 '파티에서 1인분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룩덕질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팔란의 대검'이라고 하는 희대의 쓰레기 무기가 있는데요. 유저끼리 PVP를 할 때 이걸 들고 가면 유저들이 박수를 쳐주거나 '불사대의 의례'라는 일종의 조롱하는 표현을 써 줘요."

"그런 유저들을 이겼을 때 쾌감이 짜릿합니다. 아마 상대가 느낀 굴욕감이 장난 아닐 거예요. '저거에 진다고?'하면서요. 그렇게 공용 투기장에서 금장을 찍었습니다."
이걸로도 잡을 수 있단 말야.. 믿어 줘..
"대신 파티를 할 땐 애로사항이 있어요. 다른 유저가 도움을 요청하면 똑같이 팔란의 대검을 들고 가는데, 그 유저도 팔란의 대검이 쓰레기라는 걸 아니까 못 깰까 봐 다시 돌려보내는 거죠."

"근데 다크소울3 할 땐 구린 무기가 제일 좋더라구요. 처음 태양 전사 세트를 맞췄을 땐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 단톡방에 자랑한 적도 있네요."

"지금은 RPG시간을 좀 줄이고 있어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여동생도 공부하느라 바쁘고요. RPG는 시간이 많이 드는 장르이기도 하고 이 정도면 웬만큼 즐겼다고 생각합니다."
"갓솔라셋있는 다크소울 허쉴?"

현실에서는 조용하고 침착한 친구가
RPG에선 PVP 3위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캐릭명까지 귀엽다는 점은 특히 충격적이었죠.

요즘은 히오스의 재미에 푹 빠졌다는 오라클
건담도 할 수 있는 갓갓겜이라고.
캐릭터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너무 몰입하면 안 되겠지만 '취미'라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즐기면 또 다른 내가 되는 재미가 있다. 가령 현실에서 이루지 못 하는 이상을 실현해보기도 하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오라클은 '룩덕질'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파티에 들어갔을 때 '룩 멋지네요'라든가 '엌ㅋㅋ 루시우다'하는 반응이 좋다. 아무래도 현실에서 코스프레를 하기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관심병이네요. 그런데 빤스룩은 저라도 힘들어요. 아니 부러워요. '아니 뭘 어떻게 해야 저런 룩을 만들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가 아니라 약을 마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저는 좀 더 정진해야겠습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서 RPG는 룩(R) 파워(P) 게임(G)이 아닐까 생각해요. 말장난입니다. 잊어주세요."

결의에 찬 그도 언젠간 빤스룩을 한 룩덕 괴물이 될 수 있을까? 말해놓고 보니 좀 웃기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게임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겠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오라클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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